10년 된 노트북

소중한 나의 벽돌

by Lounge And

10년 된 노트북



책상 한쪽에서 금색 벽돌이 조용히 나를 기다린다.
전원 버튼을 누르면 팬이 먼저 아침 체조를 한다.
부팅은 늘 느리고, 이상하게도 마음은 그만큼 차분해진다.


느림은 나에게 준비 시간을 준다.
케틀에 물을 올리고, 창문을 열어 공기를 갈아 끼우고, 오늘 해야 할 일의 첫 줄만 떠올린다.
기계가 숨을 고르는 동안, 나도 속도를 낮춘다.


반짝이는 키 캡 몇 칸이 있다.
자주 눌린 자리만 시간이 닳아 있다.
지문은 일종의 연대기다.
이 표면에는 흑역사와 작은 승리가 층층이 붙어 있다.


배터리는 오래전에 은퇴했다.
요즘은 어댑터에 묶여 산다.
이동성은 줄었지만 집중력은 늘었다.
콘센트 근처에서만 일한다는 제약이, 오히려 산만함을 줄여준다.


브라우저 탭은 다섯 개까지만 연다.
더 열면 이 친구가 투덜대기 때문이다.
덕분에 내가 먼저 소음을 줄인다.
뉴스는 한 번에, 자료는 폴더별로, 메신저는 특정 시간에만 연다.


알림이 뜨면 화면이 순간 멈춘다.
짧은 프리즈 동안 나는 문장을 한 번 더 읽는다.
오탈자를 바로잡고, 군더더기를 한 줄 덜어낸다.
느림은 결함이 아니라 편집 모드다.


스티커 자국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한때의 밴드, 그해의 다짐, 유행이 지나간 문장.
떼어낸 자리까지 이야기가 된다.
새 기계가 매끈하다면, 이 기계는 서사가 있다.


터치패드는 자주 기분이 상한다.
커서가 엉뚱한 데로 튄다.
그래서 마우스를 연결한다.
불편을 우회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정면 돌파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걸 이 친구가 가르쳤다.


운영체제 업데이트는 그만 오라고 했다.
브라우저도 가끔 이별을 예고한다.
그래도 문서는 열린다.
커서가 깜박이고, 파일명이 날짜를 먹는다.
글을 쓰는 데 필요한 건 최첨단보다 적정함이다.


장바구니에는 새 노트북이 들어갔다가 자주 빠진다.
사양표는 달콤하고, 가격표는 현실적이다.
결제 직전 창을 닫는다.
아직은 이 리듬이 나와 더 잘 맞는다.


이 노트북은 내가 보낸 잘못된 메일도 기억한다.
돌아온 첫 수락 메일도 기억한다.
새벽에 덜컥 보낸 지원서, 밤을 새워 고친 보고서, 끝내 지우지 못한 초안들.
기계는 감정을 모르지만, 나는 이 화면을 통해 감정을 배웠다.


팬 소리가 커지면 잠깐 멈추라는 신호로 안다.
저장하고, 컵을 씻고, 창문을 더 연다.
멈춤은 포기가 아니라 관리다.
쉬어야 오래 간다.


카페에서 이 노트북을 펼치면 콘센트 자리 찾기가 게임처럼 느껴진다.
운이 좋으면 창가에 앉고, 아니면 테이블 아래를 기어간다.
어수선한 풍경 속에서도 이 오래된 바탕화면이 나를 중심으로 모은다.


요즘 신형들은 얇고, 가볍고, 빠르다.
부러움과 무덤덤함이 반반씩 온다.
최신은 늘 매력적이지만, 적정은 오래 간다.
나는 적정의 팬이 되어 간다.


긴 문장이 떠오르면 키보드가 리듬을 만든다.
타닥타닥, 생각의 박자가 손끝에 맞춰진다.
타자기처럼 확실한 피드백이 남는다.
오늘의 아이디어는 소리로 먼저 현실이 된다.


백업은 꼬박꼬박 한다.
외장하드 하나, 클라우드 하나.
10년 된 친구와 신식 친구를 함께 쓴다.
오래된 습관이 신형 기술과 손을 잡으면, 마음이 든든해진다.


어떤 날엔 아예 오프라인으로 쓴다.
와이파이를 끄고, 문장만 남긴다.
신기하게도 그런 날에 더 많은 것이 완성된다.
연결을 끊어야 붙는 것들이 있다.


이 노트북이 내게 가르친 건 세 가지다.
한계를 정확히 알기.
우회로를 미리 만들기.
꾸준히 반복하기.
이 세 가지는 속도보다 오래 가는 힘이다.


언젠가 완전히 멈출 날이 올 것이다.
그때는 가벼운 OS를 얹어 오프라인 전용 타자기로 전직시킬 생각이다.
알림 대신 호흡, 업데이트 대신 문장.
역할을 바꾸면 수명도 바뀐다.


지금은 이 정도가 딱 좋다.
부팅에 1분, 저장에 1초, 결정에 반박자.
내 하루가 이 타이밍에 맞춰진다.
불완전한 도구와 불완전한 내가 서로의 빈틈을 메운다.


오늘도 전원을 길게 누른다.
팬이 돌고, 내가 같이 숨을 고른다.
화면이 켜지면 해야 할 일의 윤곽이 또렷해진다.
10년 된 노트북은 낡은 장비가 아니라 오래된 리듬이다.
그 리듬으로 나는 오늘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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