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살의 나는 일요일마다 어딘가 우울했다. 밤 11시쯤, 개그콘서트가 끝나고 밴드가 Part-time Lover를 연주할 때가 절정이었다. 주말은 끝이었다. 곧 잠에 들어야 했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학교에 가야 했고, 끝나면 또 가기 싫은 학원에 가야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그게 다는 아니었는데, 그 멜랑꼴리함에는 굉장히 막연하고 불쾌한 무언가가 더 섞여 있었다.
이 개그콘서트 우울증에 "실존적 문제", 말하자면 일상의 반복에서 오는 권태나 삶의 유한성에서 오는 허무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는 사실은, 고등학생이 되었을 즈음 필독도서였던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당시의 나에게 카뮈의 사상은 정말 큰 충격이었다. 카뮈는 그 밑바닥 없는 공허감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동지였으며, 그 실체를 명징하게 밝히고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는 선구자였다. '산꼭대기로 바위를 굴려 올리는 고통스러운 형벌을 끝없이 반복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행복한 시지프처럼, 부조리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면서 살 것'. 음, 힘들긴 하지만 어쩔 수 없으니 "저항"하면서 살 수밖에.
어이없게도, 나를 13살 무렵부터 때때로 괴롭히던 이 권태와 허무는 하루 5시간을 자고 12시간을 학교와 학원에서 보내는 생활이 끝나고, 대학생이 되어 자고싶은 만큼 자고, 새 친구를 사귀고, 맛있는 걸 먹으러 돌아다닐 수 있는 시간과 여유를 갖게 되자 귀신같이 사라졌다. 행복한 인생 2막의 시작과 함께, 카뮈는 천천히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가는 듯했다.
몇 년 뒤, 우연히 실존주의 심리상담을 공부하고 있던 사람과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다. 나는 문득 옛날 생각이 나서, 삶에는 내재된 목적이 없는 것도 사실이고 인간의 삶이 유한한 것도 사실인데, 그로부터 파생되는 부정적인 정서들을 어떻게 느끼지 않을 수 있는 것인지 물어봤다. 대답은 놀라웠다. 그 전제가 사실이기는 하지만, 자기 자신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거나 타인과 단절되는 등 다른 심리적 문제를 겪을 때 그것을 실존적인 불안이라는 형태로 느끼게 된다는 것이었다.
지난 날을 돌아보면, 내가 겪어온 바가 바로 그렇지 않았는가. 길고 고통스러운 터널에서 빠져나와 햇빛이 드는 곳을 걸어본 다음에야 내가 지나온 것이 사실은 수면부족과 단절과 자기소외와 열등의식 등이었음을, 그리고 나는 그것에 저항하기는커녕 그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제서야 시지프처럼 부조리에 저항하며 살라는 말은, 처한 환경을 바꿀 생각 말고 우직하게 참고 살라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자신의 자유 내에서라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으니 무의미성에 저항해 적극적으로 가치를 찾아나서라는 뜻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인간은 자기 의사와는 무관하게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이고 삶은 내재된 이정표를 제시해줄 수 없지만, 지금 어느 방향으로 향할지만큼은 내가 결정할 수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