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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u Feb 05. 2023

서로의 소망과 두려움이 마주볼 때

<봇치 더 록!>(2022)

베이스, 드럼, 기타 두 대 그리고 매번 같은 시간에 모여 연습할 의지를 가진 고등학생 네 명. 이것이 결속밴드의 구성이다. 80년대 초 MIDI의 등장 이후로 컴퓨터 한 대만 있으면 악기 하나 없이도 모든 종류의 가상악기를 연주할 수 있게 된 오늘날, 누군가 그 모든 수고와 비용을 감수하고서 밴드를 하기로 결심한다면 그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2022년 방영한 TV 애니메이션 봇치 더 록!은, 각자가 밴드 활동을 통해 추구하는 가치의 다양성만큼이나 다채로운 매력을 가진 멤버 네 명이 결속밴드라는 이름의 밴드에서 활동하며 겪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들이 같은 밴드로서 활동하지만 그 안에서 소망하는 것은 조금씩 다르다는 사실은, 주변 인물들이 주인공의 성장을 위해 평면적으로 소모되는 것을 막고 모두에게 입체적인 생동감을 부여한다.


소망은 본질적으로 두려움과 닿아있기 마련이기에, 자신의 소망을 공유하는 일은 일정 부분 자신의 두려움을 고백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결속밴드의 멤버들은 어떤 것을 소망하며, 그 내밀한 감정들은 어떻게 공유되고, 그 가치관의 상이함은 그들의 관계에 그리고 밴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각자가 가진 소망과 두려움을 중심으로, 결속밴드의 멤버들을 분석해보자.




이지치 니지카, 결속에는 무엇이 필요할까


밴드 활동에 있어 가장 어려운 일은 어쩌면 드러머 구하기일지도 모른다. 연습하기도 힘들고, 신체적인 조건을 많이 타며, 연주할 때는 뒤에 있어서 눈에 잘 띄지도 않는 탓에 다른 악기에 비해 희망자가 적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드러머는 포용력있는 인격자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은데, 생각해보면 니지카가 드럼을 맡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닌 듯하다.


다른 악기들이 자신의 연주를 할 수 있도록 템포를 잡아주는 드럼처럼, 니지카는 언제나 주변 사람들을 챙기며 가장 헌신적인 역할을 자청한다. 방황하던 료를 위해 개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히토리에게 필요한 현실감각과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며, 키타를 위해 멤버들이 즐겁게 어울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으로부터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은 아니겠지만, 니지카는 사실 밴드 내에서 가장 어두운 배경을 가지고 있는 멤버이다. 어린 시절부터 삶의 많은 부분에서 큰 변화를 겪어야 했을 정도로 말이다. 봇치의 사회적 불안이나 키타의 말장난스러운 풀네임이 개그 소재로 쓰이기도 하는 것에 비해 니지카의 가정사는 마음을 연 상대에 한해 짧게만 언급될 정도이니 그 무게감을 대강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니지카는 두려움을 통합하고 건설적인 동기로 승화시키는 작업을 가장 멋지게 해낸 멤버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머니가 남긴, ‘꿈은 아무리 힘들 때라도 길을 비춰주는 빛이 될 것’이라는 말을 따라 유일한 가족인 언니와 함께 STARRY를 빛내겠다는 확고한 목표를 세운다. 쾌활하지만 이타적인 태도로 주변 사람들을 단단히 결속시킬 줄 알며, 남는 시간에는 학교 공부와 아르바이트에, 언니를 대신해 집안일까지 도맡아서 한다. 이 정도면 이미 어엿한 어른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조금은 이른 나이부터 갖춰야 했던 어른스러움이라 하더라도, 지금의 결속밴드에 있어 니지카의 사려깊음은 그 무엇보다도 필요한 자질처럼 보인다. 히토리의 내면으로의 침잠을 꿰뚫어보는 통찰력과 품어줄 포용력은 또래 고등학생에게는 결코 흔치 않은 것임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다행히, 그 사려깊음도 필요로 하던 애정의 대상을 찾아낸 듯하다. 스태리를 빛내고 꿋꿋하게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겠다는 다짐으로 시작한 밴드 활동이었지만, 그 속에서 니지카는 이미 더 값진 것을 손에 넣은 것 같다.




야마다 료, 예술의 순수성을 위하여


니지카가 밴드에 있어 결속의 상징이라면, 료는 예술성의 상징이라 할 만하다. 현실과도, 타인과도, 심지어 지갑 사정과도 타협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진실된 취향만을 우직하게 좇는다. 쉬는 날에는 악기를 연주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라이브 공연을 보러 간다. 흥미가 없는 일에는 굳이 주목하지 않는다. 음악은 순수한 개성과 취향의 표현일 뿐, 상업의 논리가 개입하는 순간 애타게 찾던 무언가는 이미 상실되고 만다.


사실 이러한 성격은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비적응적인 것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료는 이전에 활동하던 밴드에서 트러블을 겪었던 바가 있다. 그 밴드의 풋내나지만 진정성있는 음악을 좋아했던 료에 비해 밴드 멤버들은 점차 상업적 성공에 유리한 쪽으로 방향을 틀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감정적인 면을 굳이 드러내지 않는 성격으로 인해 잘 언급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진지하게 임했을 밴드에서 지향점의 차이로 인해 갈등을 겪고 탈퇴까지 해야 했던 경험은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밴드라는 것 자체에 염증을 느끼던 무렵, 니지카가 결속밴드에 들어올 것을 제안한다. 왜 자신이냐는 질문에 당연하다는 듯 ‘네 베이스 스타일을 좋아해서’라고 답하면서 말이다. 수없이 많은 음악을 들으며 찾아온 자신만의 진실한 취향. 그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긴 여정을 떠나기로 결심한 초짜 뮤지션에게, 그만큼이나 확신을 심어줄 수 있는 말이 또 있을까.


그렇게 들어간 새 밴드에서 자신들의 색을 아무 거리낌 없이 발산하는 멤버들을 만나고, 그들이 음악을 통해 자기를 표현하는 과정을 지켜본다. 작사를 맡은 이후로 진솔한 감정의 표현과 밴드스러움 사이에서 고민하던 히토리에게 ‘따로 노는 개성이 모여서 밴드의 특색이 되는 것’이라는, 자신의 음악관을 담은 조언을 해주기도 한다. 그렇게 나온 가사에 멜로디를 입혀 곡을 완성시켜 나간다. 몇 번의 비타협과 방황을 거쳐 도착한 결속밴드라는 환경에서, 음악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료의 고집은 마침내 제 옳은 쓰임을 찾은 듯하다.




키타 이쿠요, 즐거운 일상 저편에는


교우관계는 원만을 넘어 학교의 유명인사 수준에, 처음 하는 알바에도 곧바로 적응해버리며, 매사에 적극적이고 항상 긍정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 결속밴드의 인싸력 담당. 그런 그녀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다는데, 기타 담당인데도 사실 기타를 전혀 칠 줄 모른다??


그렇다. 동경하던 선배를 따라 무작정 밴드에 들었지만, 기타 실력만큼은 그 눈부신 사교성으로도, 쾌활함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인 것이다. 결국 첫 라이브 직전, 멤버들을 그대로 남겨둔 채 탈주를 감행하기에 이른다. 그 이후 우연한 계기로 멤버들과 마주치게 되고 순간 히토리에게 왼손의 굳은살을 들키고 마는데, 사실 그동안 칠 줄도 모르는 기타를 독학하고 있었던 것이다!


키타가 밴드 활동을 통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다른 멤버들에 비하면 조금 불명확해 보일지도 모른다. 인기를 얻으려는 것도 아니고, 좇는 신념이 있는 것도 아니며 록 음악에 큰 흥미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그런 점에서 키타는 밴드에서 가장 이질적인 멤버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일하게 실내보다는 야외 활동을 더 좋아하는 멤버이며, 피드는 항상 재미있는 일과 장소로 가득하고, 약속이 너무 많아 일정을 맞추기도 힘들 지경인, '인싸' 그 자체. 어쩌면 키타는 다른 멤버들과는 달리 이미 원하는 것을 다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친구들과 보낼 즐거운 시간을 쪼개어 기타에 투자한다. 문화제를 앞두고서는 히토리와의 연습을 소화하면서 료에게까지 도움을 청할 정도로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 결과 본 무대에서 기타 솔로를 앞두고 줄이 끊어져 곤란해하던 히토리를 위해 여덟 마디를 즉흥으로 연주하며 시간을 끌어줄 정도로 발전한 실력을 보여준다. 곡이 끝난 뒤에는 히토리를 위해 한 마디 해보라며 마이크를 건네기도 한다.


그 열정이 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었는지는, 결국 공연이 끝나고 나서야 밝혀진다. 히토리처럼 관중을 사로잡을 연주는 못 하겠지만 남들과 맞추는 것은 잘할 수 있더라고, 그러니 앞으로도 히토리를 잘 받쳐주겠다고. 어떤 진심은 순수한 만큼 빛나는 법이다. 하루하루를 힘 닿는 데까지 즐겁게 살아간다. 그 속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도 즐겁게 지낼 수 있도록 돕고 싶다. 이토록 인간적인 배경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사람들이 히토리의 매력을 알아봤으면 좋겠다'는 그 순수한 호의는 더욱 빛나 보인다.




고토 “봇치” 히토리, 기타는 외톨이를 구원할 수 있는가?


시행착오가 인간관계를 배우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 가혹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결국 남들보다 더 많이 생각하고 더 강하게 느끼는 그들 일부는 그 과정을 이겨내지 못하고 관계 자체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그들은 알고 있다. 도피는 어디까지나 임시책일 뿐, 언젠가는 문을 열고 나가야 한다는 것을.


히토리가 밴드 활동을 시작한 것은 주목받기 위해서였다. 오랫동안 제대로 된 교우관계를 맺지 못한 탓에 인정받으려는 욕구는 쌓여가지만 그것을 충족할 방법은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기타를 통해 사람들의 관심을 구하게 된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초기의 목표는 멤버들과 정서적 교류를 나누면서 조금씩 변해간다 - ‘모두의 소중한 결속밴드를 최고의 밴드로 만들고 싶다’는 것으로 말이다.


아직 서투른 일이 많고 실패에 취약한 히토리에게 밴드 활동이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지를 생각해보면, 히토리를 배려하며 다방면으로 도움을 주는 멤버들을 만났다는 사실은 정말 큰 행운처럼 보인다. 여기에서라면 지난 실패도, 두려움도 딛고 일어설 수 있을지도 모를 정도로 말이다. 히토리가 오래도록 품어왔던 두려움은, 사실은 별 것 아니었던 걸까? 그렇다면, 지난 3년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날려보낸 시간이 되는 것일까.


히토리가 기타리스트를 찾아다니던 니지카와 마주친 것은 물론 우연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동안 연습해왔던 기타가 있었기에 공연을 성공적으로 돕고, 결속밴드라는 지지적인 환경을 찾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3년간 매일 갈고닦았기에 니지카의 꿈을 이뤄줄 만한 내공을 가지게 되었고, 내면 세계로의 깊은 확장이 있었기에 자신만의 노랫말을 써내려갈 수 있었으며, 누구보다 자기반성에 충실했기에 그 매력에 이끌린 키타의 진심을 엿볼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그저 우연이나 행운이라기보다는, 벽장 속에서 쌓아왔던 노력의 결과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니 말이다.


애니메이션의 마지막 화는 “오늘도 아르바이트인가...”라며 잠시 숨을 돌리는 히토리의 독백으로 끝난다. 타인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던 히토리가 어느샌가 아르바이트를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장면은, 조금 느리지만 확고한 하나의 변화를 그리고 있다. 서로가 서로의 소망을 바라보며 각자의 두려움을 향해 발을 떼었던 그 모든 순간들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어쩌면, 어떤 사람들은 시행착오에 준비가 조금 필요한 것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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