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민정 Aug 24. 2023

광안리의 기억 -우리들의 소꿉놀이

사람은 지난간 일에 대해서는 좋게 기억하는 심리가 있다고 한다. 그런 심리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어린 시절에 관한 기억은 애틋함과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나는 2살 때부터 작년까지 광안리에서 살았다. 내가 기억하는 하는 어린시절의 모습은 6살 이전 기억은 없으니,  내가 ‘살았던 곳’은 광안리가 전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광안리에 살면서 이사를 두 번 했는데, 원래 살고 있던 곳에서 밑으로 100미터로 한번, 그리고 그 곳에서 옆으로 200미터 한번 했다. 이용하는 버스정류장도 변화가 없었다. 목욕탕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한곳에 오래 살기 때문이었을까? 내가 생각하는 부산의 범위는 생각보다 협소했는데, 서쪽으로는 남포동, 북쪽으로는 서면, 동쪽으로는 해운대가 다였다. 큰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곳’에 대한 관심이나 열망도 생겨나지 않았다. 그런 것이 가능한 이유는 광안리가 아주 좋은 지리적 조건과 다양한 편의시절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는 어린시절의 풍경은 다른 아이들과 다른 점이 좀 많았다. 대부분 장사하는 부모밑에서 자란 우리들은 놀이시절이 없어 거리에서 놀았고, 바쁜 부모들 때문에 다 함께 모여서 놀기를 즐겼다. 그 시절 아이들은 모두 함께 놀기를 즐겼겠지만, 우리들의 놀이방식이 달랐다. 맹모삼천지교가 딱 맞아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부모들이 장사를 하는 집 자식들이었으니, 소꿉놀이를 해도 엄마 아빠 놀이가 아니라 상가를 차려놓고 놀았다. 누구는 식당을 하고, 누구는 그릇가게를 하고, 또 누구는 은행을 하는 식이었다. 항상 문제는 은행에서 발생했는데, 도무지 은행은 돈을 벌지 못했다. 은행에 저금을 하면 이자가 붙는 다는 것은 알았지만, 어떻게 수익을 남기는 지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가짜로 만든 통장에 이자를 붙여주고, 그것을 받아들고는 즐거워했던 기억은 난다. 물론 은행은 열심히 했지만 항상 망했다. 나중에는 은행은 이익을 남기는 곳이 아니고, 이자만 주는 공공성을 가진 곳으로 하기로 하고, 결산에서 빼는 것으로 했다.

 

몇몇 집들이 이사를 오면서 우르르 몰려다니는 숫자가 많아지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파벌이 형성되었고, 리더는 당연히 가장 연장자 두 명이서 갈라먹게 되었다. 둘 다 여자였다. 파벌간의 대단한 에피소드는 별로 기억에 없는데, 서로 인사를 안하는 정도였던 것 같다.


그 파벌싸움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나의 작은 언니였다. 언니는 아직도 그때 이야기를 하면서 펑펑 우는데, 한 쪽 파벌의 리더가 나의 큰언니였다. 그런데 우리 큰언니가 두 살 어린 작은언니를 왕따 시켰다. 왕따의 이유는 불명확한데 아마도 우리 자매중에 가장 이뻤던 작은 언니에 대한 질투심이 아니었을까 싶다. 상대파벌의 리더 동생을 받아 들일 수 없었던 다른 파벌의 입장이 있는 법이니 작은 언니는 그 어느 파벌에도 끼지 못하게 되었다. 언니 기억으로는 꽤 오랫동안 혼자 놀다가 함께 놀아달라고 200원을 던져주고 큰언니 파벌속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일종의 입회비까지 받은 셈이니, 장사꾼의 자식들답다. 두 파벌은 그냥 같이 안노는 수준으로 묘한 대립관계를 유지했는데, 한쪽 파벌의 다수를 형성했던 집안이 다른 동네로 이사 가면서 그냥 정리되었다. 


나뉘었던 파벌은 하나가 되었고, 리더인 우리 큰언니는 부르마블 종이돈으로 하는 소꿉놀이가 유치해졌는지, 실제 벌이를 만들었다. 


그것은 고철줍기였다. 


당시 우리의 하루 용돈을 100원이었다. 공터 흑을 파거나 하면 못이나 철사등이 나왔고, 그것을 고물상에 가져다 팔면 돈을 주었는데, 분배는 당연히 리더의 몫이었다.

우리집 옥상에 모여 작전을 짜고, 조를 나누고, 구역을 배분하고, 이후에 다시 모여서 성과물을 나눠가졌다. 당시 나에게 돌아오는 돈은 150원에서 200원 가량이었는데, 하루 일당의 두배를 받는다고 생각해봐라. 얼마나 큰돈인가. 


나는 일당을 받기 위해 꼬박꼬박 모임에 나갔다. 정산 후 돌아오는 성과에 모두가 만족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나의 어머니께서 동네 아이들이 고철을 줍는 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우리 모두를 가게로 불러서 엄청 혼을 내셨다. 살면서 본 어머니의 가장 무서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돈의 유혹은 어머니에 대한 두려움보다 큰 것이었다. 우리는 그 유혹을 쉽사리 뿌리치지는 못했다. 그리 혼나고서도 다시 조직을 정비해서 고철줍기에 나섰는데, 당연히 조직원의 숫자는 줄어있었다. 이 고철줍기는 어머니께서 절대 들지 않으셨던 몽둥이를 들고 큰언니와 독대하는 것으로 정리된 것 같다. 때렸는지 안때렸는지, 모친께서 당신을 때리라고 했는지는 기억이 안나는데, 묻기조차 어려운 분위기였던 것만은 확실히 기억난다. 


그렇다고 벌이를 포기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물론 벌이만이 목적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뭔가를 하면 항상 ‘돈’과 연결시키는 것이 자연스럽게 된 것 만은 확실했다. 우리가 기획 한 것은 ‘연극’이었다. 큰언니의 주도하에 온 동네 아이들이 모여서 연극을 만들었다. 


아무도 교회같은 곳에 나가지 않았던 까닭에 ‘강당’ 같은 곳에서 공연을 하기는 어려웠고, 옥상 올라가는 계단에 무대를 만들었다. 뒤에서는 서서봐야했고, 앞에서는 수그리고 봐야하는 역구조가 되었지만 우리는 아랑곳 하지 않고 일을 진행시켰다.기획을 하고 연습을 다했으니 다음 순서는 당연히 구경꾼을 모으는 것이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표를 팔았다. 표 값은 100원. 


스토리도 기억이 안난다. 조직원 중 가장 막내였던 나와 나의 친구는 쌍둥이로 나와서 중간에 귀신이 죽여서 피를 토하고 죽는 역할을 맡았다. 피가 필요했는데, 생각보다 쉽게 피를 만들었다. 죠스바를 녹여서 비닐봉다리에 넣고 그것을 촛불로 녹여서 봉했다. 그리고 그것을 입에다 물고 있다가 터뜨리고 우리 둘은 빠지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동네 아이들이 많이 몰려들었고, 연극이 시작되면서 셔터를 내렸다. 표를 산 사람들만 입장을 시키고 열연을 펼치고 있었는데, 셔터문이 열렸다. 


상대적으로 잘살았던 만화방 아줌마가 딸의 손을 잡고 셔터 문을 연 것이다. 약간의 소란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간추리자면, 50원 밖에 없었던 그 딸이 연극을 보고 싶었는데, 표값이 100원이었기 때문에 입장을 못한다고 해서 울면서 집에 갔고, 어머니께서 50원 내고 보게 해주라고 한 것이었다. 잠시 소란을 정리하면서 연극은 뒤죽박죽이 되었고 죽었던 나와 나의 친구가 다시 등장하는 등 이상하게 끝을 냈던 것 같다. 아마도 정리는 고학년들이 알아서 했겠지. 


큰언니가 고학년이 되어가고, 몇 집이 더 이사를 가면서 조직은 거의 해체되었고, 세대도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놀이방식도 바뀌게 되었다. 몰래 남의 아파트에 잠입해서 놀이기구를 타다가 쫒겨나기도 했고, 차도에서 피구며, 고무줄놀이며, 오징어달구지, 진돌 같은 것을 했다. 차가 지나다니면 옆으로 비켰다가 다시 시작하곤 하는 번거로움을 반복해야만 했다. 그래도 그 역시 스릴 있었고, 익숙해졌다. 우리가 가장 좋아했던 놀이는 피구였다. 하지만 자주 할 순 없었다. 우리에게는 공이 없었으니깐.


집에 피구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한명 있었는데, 그 친구가 있을 때에는 마음껏 피구를 할 수 있었지만, 그 친구는 자주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우리는 무척이나 피구를 하고 싶었다. 온 동네 아이들이 다 같이 모여서 놀았지만, 한 집만은 우리랑 놀지 않았다. 그 집은 소방도로를 두고 마주 하고 있는 장사집이 아니라 그 뒤편에 살고 있었던 아이였다. 대신 그 집은 유일하게 식모를 두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 식모 언니랑 친했다. 


무척이나 피구를 하고 싶었던 우리는 식모언니를 졸랐고, 결국 주인집 피구공을 들고 나오게 되었다. 우리는 무척이나 신이 난 상태로 피구를 했다. 하지만 우리가 놀았던 곳은 차들이 다니는 길 한가운데였고, 그날도 차가 와서 하던 게임을 중단하고 양쪽으로 갈라져서 피하게되었다. 누구의 손이었을까? 공을 놓쳤고, 굴러간 공은 달리는 차 밑으로 들어갔다.그리고 그 차는 야속하게도 그 공을 터뜨리고 그대로 질주해버렸다. 


그 짧은 순간은 영화의 슬로우비디오처럼 나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데, 우리에게는 인생에서 가장 난감한 순간으로 꼽힐 수 있는 장면이었다. 피구공 하나 사줄 만한 형편이 되지 못한 부모님들이 그 공 값을 책임지고 물려줄 것도 아니었고, 자기 공도 아니고 주인집 공을 가지고 나온 식모언니의 상황까지 우리들은 그야말로 멘붕 상태였다. 머릿속에 개미가 기어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약해지기는 했지만, 조직이었다. 무엇보다도 돈을 모을 줄 알았다. 다시 고철을 주웠냐고? 모친에게 맞아죽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회의를 통해서 말이다. 


우리는 라면 박스를 구했고, 그 겉은 도화지로 붙였다. 말끔해진 상자위에 네모난 구멍을 뚫었고, 겉표지에 이렇게 적었다. 


“모금함” 


우리는 모금함을 만들었고, 상가들을 돌았다. 전후 사정을 설명했고, 어른들은 껄껄 웃으며 돈을 넣어주셨다. 아직까지도 야속한 분이 기억에 남는데, 한복집을 했던 아주머니는 100원만 주겠다고 하셨는데, 잔돈이 없다고 했다. 1000원을 줄터이니 900원을 돌려 달라고 했고, 잔돈이 없었던 우리들은 그 집에서 모금함을 뜯고 잔돈을 드렸다. 나오면서 우리는 그 아주머니를 욕했고, 다시 모금함을 만들었다. 


공을 사줬는지, 돈이 얼마나 모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식모 언니가 어색하게 웃고 있었던 모습은 남아있는데, 돈을 받아서였는지, 주인집에서 그냥 넘어가자고 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늘이 붉게 물들어갈 시간이었으니, 낮부터 꽤 많은 시간을 모금했던 것 같기는 하다. 


아! 물론 그 뒤로 그 식모언니와 놀지는 못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