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잘 정리가 되지 않는 복잡한 가계도를 가진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세 번째 부인의 장남이었다. 나에게는 큰아버지가 두 분이나 계셨지만 어쩐 일인지 우리 아버지는 ‘장남’이라는 지위가 부여되었고, 더불어 대를 이어야 하는 ‘아들’이 필요했다.
결혼하자마자 첫째를 아들로 놓았던 어머니는 부여받은 임무를 완수하실 뻔 했지만,그 오빠는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저세상으로 가면서 어머니는 아들을 놓을 때 까지 애를 가지셔야 했다. 그 뒤로 태어난 자식은 딸, 그리고 또 딸.
세째인 나는 “배의 크기나 걷는 걸음을 봐도 딱 아들이다.!”는 옆집 산파 할머니의 확신덕분이었는지 모든 사람이 아들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가끔 그 분이 오시기도 하니 그 말은 얼마나 신빙성이 컸겠는가.
어머니가 만삭이 되어가면서 그 기대감들은 증폭되었고, 더운 여름 이틀의 산고 끝내 태어난 내가 세상을 처음만나서 들은 말은 산파할머니의 “에잇! 더런 년.”이었다고 한다.
아들이었다고 생각해서였을까? 나는 머리를 길게 기르고 다녔던 언니들과 달리 항상 짧은 머리였고, 치마보다는 바지를 주로 입고 있었다. 온 동네 주민들이 여권을 만들어 제주도로 여행 다녀온 날 부모님들은 언니들에게는 공책과 연필들을 선물했지만, 나에게는 장난감 권총을 사가지고 오셨다.
아들인 줄 알고 낳았다는 말은 내가 원하지 않아도 여기저기서 듣게 되었고, 나는 존재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집안일 보다는 밖의 일에 관심이 많았던 아버지의 무심함도 이런 나의 불안감을 증폭시키는데 한 몫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내색을 하신 적은 없이 오히려 ‘너는 복이 많아서 나중에 시집갈 때 온 집안의 복을 다 가지고 가니 몰래 속옷을 숨겨두고 가라고 했다.’는 말을 자주 해주셨다.
존재의 불안감과 복이 많은 사람임을 증명하고픈 마음이 어렸을 때부터 마음속에서 자라났지만,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장사하는 집 자식에게는 인정을 받는 기회가 그리 많이 오지 않았다. 그런 것은 항상 주류의 몫이었다.
주류들은 아파트에 살고 아버지가 ‘무역회사’에 다니고 키도 크고 공부도 잘하는 아이들이었다. 나에게는 항상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선생님과의 관계도 좋고, 생일 잔치를 해도 참 요란하게 했던 것 같다. 생일이 되면 반에는 묘한 기류가 흘렀다. 주류에게 초대 받는 사람들의 안도감과 받지 못하는 사람의 박탈감들이 교차하는 미묘한 순간들은 사람에게 위축감을 주었다.
난 별로 초대를 받지 못하는 아이였다. 비슷한 환경 속에서 자라고 모두가 어울려서 놀았던 동네 아이들과 달리 학교는 일정한 기준에 의해 분류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런 모습은 학년이 바뀌어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고, 눈부신 외모를 가졌던 것도 아니었고, 아버지가 사가지고 왔다고 자랑할 만한 외국제품도 없었으니 나는 주류들처럼 대규모로 그룹을 만들지 못하고, 주변부에서 맴도는 아이었다. 주변부의 아이들은 시끄럽게 놀지 않았고, 학년이 바뀌면 근처에 있는 ‘남은’아이들과 놀게 되었다.
그렇게 평범하게 한 학년씩 올라가고 5학년이 되었다. 아마도 나의 짝이었던 것 같다. 나의 기억
몇 장면 속에 그 친구는 내 옆에 앉아있으니까. 아버지가 배를 탄다고 했다. 어느 날 별로 잘난 것이 없었던 나에게, 아버지가 가져왔다는 해마를 주었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고, 말린 것이었다. 그것을 전해 받았을 때 해마라는 이름도 신기했고, 그 모양도 너무나 신기하였다. 바다의 말이라….
비릿한 냄새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필통 속에 곱게 뉘어 다녔고, 그 야릇하고 이국적인 물건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 좋았다. 이단으로 되어 있는 철 필통 아래칸에 해마를 넣고 다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친구가 좋아졌던 것은 아니었다. 말을 조금 더듬었고, 얼굴에 버짐도 있었다. 버짐은 가난의 상징 같은 거였다. 남은 아이들과 놀면서도 나는 주류로 편입하고 싶다는 욕망을 잃지는 않았고, 마음속에는 남은 아이들을 무시하는 마음도 함께 있었으니깐.
어느날 우연히 주류에서 놀고 있었던 아이가 나의 해마를 보았고, 온갖 좋은 소리를 다하며 해마를 가지고 싶다고 했다. 나는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가난한 비주류의 아이가 건낸 호의는 간단하게 무시되었다. 해마를 주면 키가 크고 반에서 활발한 그 아이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더불어 무리의 일원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그 해마는 친구에게 건내졌다. 하지만 해마를 대가로 한 우정은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 주류아이 역시 내가 그랬던 것처럼 가난한 비주류가 건낸 호의를 간단하게 무시한 것이다. 그것을 주면 끼워서 같이 놀아주겠노라는 약속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고, 그저 나의 헛된 기대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이렇다 할 항의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비주류는 주류에게 항의 같은 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오래전부터 체득하고 있었으니 그저 씁쓸한 마음을 홀로 달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얼마 뒤, 나에게 처음 해마를 주었던 친구가 다른 아이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친구는 주류아이에게 따졌다. 어디서 난 해마냐고. 그것은 나의 것이라고! 조용했던 친구가 큰 소리를 내는 모습을 처음 보았던 나는 무서움을 느꼈지만, 주류의 아이는 별스럽지 않게 내가 주었고 자신의 손에 왔으니 이것은 나의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 다툼은 짧았다. 자리로 돌아온 친구는 나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선물을 왜 남을 주냐는 항의도, 나쁜 아이라는 원망 섞인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나에게 말을 거는 횟수가 줄었을 뿐이었다. 그 아이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는데, 차라리 너무 화가난 표정이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 내가 기억하는 그 아이의 모습은 ‘역시나’ ,‘원래’이런 단어가 어울리는 체념같은 표정이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우리들은 다 다른 반이 되었고, 좀 지나서는 중학생이 되었으니 다시 만날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 기억은 아쿠아리움 같은 곳에 가서 ‘해마’를 보게 되면 다시 떠오르게 되는데, 나는 벌거벗겨진 느낌을 받곤 한다. 주류라면 주류, 권력이라면 권력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덜 가진 사람들의 것을 쉽게 무너뜨리고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닌지를 검사 받는 것 같다.
그리고 그 검사 결과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