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들은 ' 인간극장' 이나 ' 이것이 인생이다.' 같은 프로그램이나, 박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같은 것을 봐도 좀 시큰둥한 편이다. 누구의 인생이든 굴곡은 있고 어려움은 다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라기 보다는, 어머니의 삶이 그리고 우리의 삶이 그들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기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일기를 쓰고 계시는 어머니는 때가 되면 그 일기장을 나에게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들 말고 얼마나 많은 숨겨진 이야기가 있을지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우리집이 광안리로 이사오기 전에 부모님들은 문현동과 대연동에서 사셨는데, 그때도 이불가게를 하셨다고 한다.
이불가게에서 누비를 배우다가 독립을 해서 가게를 차리셨고, 광안리로 옮겨오면서 확장 개업을 하신 것이다.
개업한 초반에는 작업실이 따로 없어서 가게에 이불을 누비는 미싱기가 있었고, 솜이불은 가게에서 만들다가 손님이 오면 중단을 하고 옆으로 잠시 치웠다가 손님이 가시고 나면 다시 펼쳐서 작업을 하곤 했다.
장사가 조금씩 잘되고 시장에 납품하는 이불을 하청받아 만들게 되면서 작업장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가게에서 조금 떨어진 반지하 창고를 얻었다. 지하공간은 꽤 넓었는데 한쪽은 미싱들이 6대 정도 배치 되었고, 한쪽에는 이불을 상시적으로 펼치며 솜을 놓고 이불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옆쪽에는 이불을 만들 각종 천들과 솜들도 가득차 있었다.
항상 어두운 곳이었고 지하에서 나는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가득차 있었지만, 나는 지하 작업실에서 노는 것을 좋아했다.
명주 솜들이 쌓여 있는 곳으로 몸을 던지고 놀곤 했는데 나의 몸을 푹신하게 받아주는 느낌이 좋았고, 여러 종류의 천들은 내가 '재작(말썽의 경상도 사투리)' 부리기 좋은 재료가 되었다.
어설픈 솜씨였지만 천으로 몸통을 만들고 그 안에다 솜을 넣고 단추로 눈을 만들어 테디베어에 버금가는 인형을 만들기도 했다. 두툼한 옥스포드천을 가지고는 주머니도 만들어서 수첩 같은 것을 넣어다녔다.
초등학교때는 미싱을 다루기 까지 했는데, 어머니는 내가 미싱질을 하는 것을 무척 싫어하셨다.
어린 아이가 기계를 다루니 자주 실을 엉키게 만들어서 일하시는 분들이 미싱을 쓸 때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고, 숙련자들도 가끔 미싱 바늘에 손을 다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미싱을 다루는것을 싫어하셨던 가장 큰 이유는 이런 재주를 가지게 되면, 평생 이 재주로 먹고 살게 된다는 미신같은 불안감때문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감이 많아지면서 놀고 있는 미싱이 없게 되고, 더불어서 나의 미싱놀이는 수명을 다했다.
가게 주인이었고, 일하는 사람들을 많게는 10명 가까이 두었지만 어머니의 모습은 ' 사장' 혹은 ' 주인'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있었다. 인성이 누구위에 굴림하는 스타일이 아니기도 했지만, 일하는 사람들에게 일을 맡기고 관리만 하는 처지가 못되었기 때문이다. 함께 이불을 만드셔야했고, 장사도 해야했고, 물건을 하러 진시장도 다니셔야 했고, 일하는 사람들 먹일 밥도 하셔야 했던 어머니는 그저 우리집에서 일하는 사람들 보다 해야할 일이 훨씬 많은 사람일 뿐이었다.
당시 일하던 사람들은 점심을 우리집 안방에서 함께 먹었다. 먹는 사람이 많으니 조리기구들은 항상 큰것으로 구비되어 있었고, 남들은 잔치할때나 꺼내쓰는 커다란 상에다 원형의 상을 함께 붙여서 먹었다. 植口라는 말이 딱 맞아 떨어졌다. 일하시는 분들과는 진짜 가족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음식 솜씨가 무척 뛰어났고 아버지때문에 고생한다는 연민까지 더해져서인지 일하는 사람들은 어머니를 무척 좋아 했다. 그건 동네 사람들도 마찬가지였고, 친척들도 마찬가지였다.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해서 구사하는 단어가 가끔 틀리기도 하고, 잘못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하시곤 해도 사람들은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바른 이야기를 하지만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버지와는 달랐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평가할때 그 사람이 하는 말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가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게 된 거 같다. 아무튼 어머니의 품성을 좋아했던 사람들은 우리집에서 일을 그만두고서도 명절이나 길을 지나다가 들러서 안부를 전하곤 했다.
미싱 솜씨도 뛰어나셨고 오토바이도 잘 타셔서 배달도 잘 하셨던 아버지는 어머니의 영향력하에 있던 이불가게가 싫어졌는지, 주변사람들의 조언에 힘 입어 이불가게에서 손을 떼고 각종 다양한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하셨다. 이런 저런 아버지의 사업은 어머니께서 뼈빠지게 번 돈으로 메꾸는 형태로 정리되었다. 사업 종류는 달랐지만, 결과는 항상 동일했다. 지금도 친척들은 그 때를 이야기 하시며 아버지만 아니었다면 집을 몇 채는 사셨을 거라고 하신다. 큰언니의 돌반지, 어머니의 한복, 어머니의 결혼 반지등은 자주 전당포에 맡겨졌고 결국 다시 찾을 수는 없었다.
또한 으레 사업에 줄줄이 실패하는 사람들이 함께 하는 도박과 바람 같은 것도 아버지는 그 어느거 하나 빼놓지 않으셨다.
총각이라고 속이고 처녀를 임신시켰을때는 막대한 합의금을 가져다 받쳐야 했는데, 그 돈은 외삼촌이 총각때 외양선을 타면서 어머니에게 관리를 부탁하며 보내준 돈으로 줬다고 한다. 타국 바다에서 오랫동안 고생하면서 보낸 돈을 상의도 없이 써버린 큰 누나에 대한 원망은 그리 쉽게 사라지질 수 없는 것이었을까? 나는 이 사연을 외숙모와 어머니의 사이가 틀어졌을때 외숙모에게 전해 들었다. 인테리어 사업이랍시고 도배와 장판일을 하실때는 같이 작업하시는 분과 일을 하시러 가신 것인지, 바람을 쏘이러 가신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내가 머리가 굵어지면서 하나 둘씩 듣게 되었는데,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이야기가 있을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다.
어릴 적 내가 기억하는 장면은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찾아오라고 해서 간 동네술집 문을 여니 아버지는 일하는 젊은 여자분과 맥주 3병을 앞에 두고 환한 웃음을 짓고 있다가 나의 부름에 좀 전과는 완전히 다른 표정으로 바뀌셨고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자리를 뜨지 않고 개기시던 모습이다. 이런 아버지에게 부성을 느낀다는 것을 애초 불가능한 것이었다.
잘풀리지 않는 사업이 답답했을 것이고, 누구하나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지 않다고 느낀 아버지는 종종 술을 드시고는 어머니와 다투기도 했는데, 그럴때면 우리는 엉엉 울면서 옥상으로 올라가서 무릎을 꿇고 달님에게 " 제발 싸우기 말게 해주세요."라고 빌었다. 하지만 달님은 소원을 들어주는 능력이 영 시원찮았다. 우리들은 꽤 자주, 그리고 꽤 오랜시간을 옥상에서 울다가 기도하다가 지쳐서 쉬면서 보내야 했으니깐.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람에게 직접적인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았지만, 몇가지 세간 살림들이 박살 나기도 했고, 아버지의 손에 의해 뜯어진 금목걸이 줄을 어머니와 함께 후레쉬 들고 찾기도 했다.
주변에서 시쳇말로 펌프질 하면 신이 나는 스타일인 아버지는 한방을 노리고 대구보일러집 골방에 쳐박혀서 화투를 자주 쳤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시간이 날때 심심풀이로 하는 수준을 넘어섰다. 사업실패는 모아둔 돈을 한꺼번에 잃는 방식이었다면, 도박은 집에 돈이 없으니 남에게 빌려서 하는 방식이었다.
돈을 조금 따는 일이 생기면서 자신감이 붙은 것인지, 아니면 주변 꼬임에 빠져서인지 아버지는 큰 판으로 입문하셨다. 80년대 중반 1000만원을 3부 이자를 주고 집산다고 거짓말을 하고 돈놀이 하시는 분에게 어머니의 신망을 이용해서 몰래 빌렸다. 그렇게 빌린 돈을 날리는데는 오랜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한방에 날아갔다. 하지만 그 돈을 갚는데는 무려 1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한꺼번에 원금을 갚아야 하는 사채의 특성상 어머니는 도저히 그 돈을 갚을 수가 없었는데, 어느날 우리집에서 일을 했던 적이 있던 '김양' 언니가 놀러오면서 해결되었다. 어머니의 사연을 들은 김양언니가 선뜻 1000만원을 빌려줬기 때문이었다.
광안리에 놀러왔다가 어머니가게에 드른 김양은 아주 성공한 사람이 되어 있었는데, 그 사연은 이랬다. 우리집에서 일을 하다가 그만두고 해운대 달맞이 고객의 레스토랑에서 일을 했는데, 그 가게에서 사람을 만나고 결혼을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가게를 차리기로 마음을 먹고, 막대한 대출을 내서 해운대에 3층짜리 쇠고기구이 전문점을 열었다. 목이 그리 좋은 곳이 아니었음에도 불구 하고 장사는 개업 첫날 부터 잘되었다고 한다. 자기 새끼 입에 밥 들어 가는 것을 보는 거 만큼이나 돈을 세는 것은 밥 안먹어도 배가 부른 법이니, 이틀밤을 꼬박새워도 피곤하지 않고 입가에 미소가 가득한 날들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무리해서 빌렸던 대출금은 그리 어렵지 않게 갚아져갔다고 한다. 하지만 인생의 절정기를 맛볼 즈음 불행이 찾아왔다.
장사가 잘되고 돈을 잘 번다는 소문이 나면 으레 이런 저런 사람들이 찾아오게 마련인데, 남편의 후배가 찾아와서 술 한잔 하자고 해서 광안리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렇게 집을 나선 아저씨는 돌아오지 못했다. 다음날 뉴스에는 '광안리 총격사건'이라는 헤드라인으로 텔레비전부터 신문까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그 피해자는 아저씨였다. 지금도 놀랄 만한 일이지만, '권총'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한국에서 후배가 쏜 권총에 머리를 맞아 죽은 것이다.
같은 부산지역에서 일어났어도 놀랄 만한 일이 슬리퍼 끌고 내려가서 술 한잔하고 오는 광안리 바닷가에서 일어났으니 온 동네 사람들은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꽤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우리와 연결된 사람일 꺼라는 생각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어머니는 그 사연을 나에게 들려주었고, 얼마뒤 김양언니의 영혼 결혼식에 다녀오셨다. 결혼식도 못 올리고 애만 둘 놓고 살았는데, 절에서 올린 영혼 결혼식에서 기어이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빌려준 돈으로 고리의 사채는 정리되었고, 어머니는 한 때는 월급을 줬던 김양에게 돈이 생길 때마다 돈을 갚는 처지가 되었다. 더불어 나는 대학생이 된 이후 방학때 마다 그 가게에서 쇠고기를 자르고 음식을 나르는 아르바이트 생이 되었다. 알 수 없는 씁쓸함이 있기는 했지만, 나는 꾸준히 그 집에서 '사장님'으로 모시며 일을 했다.
그래도 김양 언니는 나에게 일종의 특혜 같은 것을 주곤 했다. 말도 안되는 영어가 조금 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 외국 손님이 올 때 전담하게 해서 조금 널널하게 일을 하게 만들어 주기도 하고, 겨울에는 대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거래처에 보내는 연하장 주소를 적는 일 등을 맡겨서 조금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관광지에 있는 음식점이니 만큼 하루 알바비를 넘는 팁도 꽤 많이 받았고, 가끔 연예인도 보고 했으니 그리 나쁜 일터는 아니었다. 그 뒤 김양언니는 다른 분을 만나서 해운대의 특급 호텔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며 재혼했고, 나는 지금까지도 고기굽고 자르는 기술이 남달라서 고기집에서 고기를 구우며, 남들보다 더 많이 먹으며, 술도 마시며, 대화도 주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