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로에베는 제주도 공예가에 매혹되었는가

성실의 시간, 럭셔리의 시간

by 임상덕

성실의 시간, 럭셔리의 시간: 왜 로에베는 제주도 공예가에 매혹되었는가


럭셔리 브랜드 로에베(LOEWE)는 매년 전 세계 공예가를 대상으로 국제 공모전인 ‘로에베 재단 공예상(LOEWE Foundation Craft Prize)’을 개최합니다. 우승 상금 5만 유로(약 7,000만 원)라는 규모보다 이 상이 지금 현대 공예계에서 갖는 권위와 영향력이 큰데요


지난 2022년, 전 세계 116개국 3,100여 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최종 우승을 차지한 주인공은 한국 제주의 정다혜 공예가였습니다. 제주대학교에서 조소를 전공한 그는 제주 지역의 500년 전통인 ‘말총 공예’를 현대적 조형 언어로 재해석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제주 출신 정다혜 공예가 작품 '성실의 시간'은 2022년 로에베 공예상 파이널 우승 작품이다


말총으로 엮어낸 ‘시간의 구조'

수상작의 제목은 <성실의 시간(A Time of Sincerity)>입니다. 작가는 말의 갈기와 꼬리털인 '말총'을 주재료로 삼습니다. 조선 시대 갓이나 망건을 만들 때 쓰이던 말총 공예는 오늘날 그 명맥이 거의 끊겨가고 있는 기술입니다.


정다혜의 작업은 이 사라져가는 기술을 단순히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한 올 한 올 엮어가는 고된 반복 작업은 수 시간, 수일, 때로는 수주의 시간을 요구합니다. 그렇게 축적된 시간은 ‘투명한 구조를 가진 항아리’라는 물질로 형상화됩니다. 바구니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빛과 밀도, 그리고 인내의 층위가 담겨 있습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공예품을 넘어,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에 대한 예술적 경험을 하게 합니다.


왜 럭셔리 브랜드는 공예를 주목하는가


로에베 같은 글로벌 패션 하우스가 왜 도자기, 목공, 유리, 그리고 말총 공예까지 아우르는 공모전에 열을 올리는 것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공예는 곧 럭셔리 산업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1846년 마드리드의 작은 가죽 공방에서 시작된 로에베에게 공예는 브랜드의 기원이자 정체성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이 공모전은 단순한 홍보 이벤트가 아닙니다. 브랜드의 뿌리를 현재와 연결하여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증명하는 고도의 브랜딩 활동입니다.


로에베 공예상의 심사 기준은 다음 사항들을 주로 보는데요, 기술(Skill), 혁신(Innovation), 그리고 예술성(Artistic Merit). 입니다. 특히 전통 기술을 그대로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적인 맥락으로 어떻게 변형했는지를 엄격하게 평가합니다. 정다혜 작가는 전통 재료인 말총을 사용하면서도, 그 조형미를 지극히 미래적인 건축적 구조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압도적인 평가를 받았습니다.


럭셔리 브랜드들은 글로벌 공예가들과 연결을 통해 자신들 정체성과 본질을 드러내고자 한다



AI 시대, 가장 강력한 차별화로서의 공예


정다혜의 작품은 기계가 결코 재현할 수 없습니다. 작가가 수만 번의 손길을 거치며 유지하는 미세한 긴장감, 재료와 사투를 벌이는 과정, 그리고 그 반복 속에서 오는 육체적 고통의 서사는 오직 인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영역입니다.


공예는 곧 시간을 드러내는 기술입니다. 효율과 속도가 지배하는 AI 시대에, 역설적으로 '성실함'이 축적된 공예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합니다. 제주의 지역성과 역사성을 품은 정다혜의 작업이 글로벌 무대에서 통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그 안에 담긴 인류 보편적인 가치인 '시간의 정성' 때문일 것입니다.


정다혜 작가는 로에베 재단의 지원으로 2026년 스페인 마요르카의 '벨몬드 호텔 라 레시덴시아' 레지던시에 초대되었습니다. 오랜 역사를 지닌 데이아(Deià) 예술 공동체에서 그녀가 새롭게 엮어낼 시간은 어떤 모습일까요. 제주도 말총이 스페인 밝은 햇살 아래서 또 다른 미래를 위한 작품이 되기를 응원합니다.


정다혜 공예가가 작업하는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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