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이스한 교사인 척, 속으론 욱 ep.2
※ 이 글은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한 에세이입니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여러 사례를 종합해 재구성한 가상의 인물입니다.
“선생님, 저 자퇴하려고요.”
졸업한 지 채 일 년도 안 된 제자가, 스승의 날에 찾아와 내뱉은 첫마디였다.
자퇴라니.
고등학교 입학 두 달 남짓,
이제 막 봄기운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게다가 한나는 중학교 3년 내내 임원을 도맡아 하고,
공부며 행사며 빠지는 법이 없던 학생이었다.
모범생이라는 말이 더없이 잘 어울리는, 그런 아이.
캔 커피를 건네는 손끝까지도 여느 때처럼 공손했다.
나는 그걸 받아 들며, 놀란 마음을 삼키듯 한 모금 넘긴 후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 있었니?”
아이는 잠시 눈을 내리깔더니 작게 말했다.
“첫 중간고사 때문에요…”
한나가 입학한 자사고의 분위기는 중학교와는 사뭇 달랐다. 예전엔 상위권 몇몇 아이들만 시험에 매달렸지만, 이곳에서는 반 전체가 내신에 매달렸다.
3월 초, 친구를 사귀기에도 모자란 그 시기에도
쉬는 시간 교실엔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릴 정도였다.
중학교 때 공부 좀 한다고 자부했던 한나도 나름대로 애썼지만, 똑똑한 아이들 틈에서 예전 성적을 지킬 자신이 점점 없어졌다.
불안은 집중력을 갉아먹었고,
흩어진 집중력의 틈새로 다시 불안이 스며들었다.
처음으로, 공부가 ‘버겁다’고 느껴졌다.
중간고사 첫날,
첫 교시가 하필 제일 약한 수학이었다.
긴장한 마음에 쉬운 1번 문제부터 막혀 시간을 허비했다. 파르르 떨리는 손을 간신히 부여잡았지만,
머릿속은 이미 엉켜 있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심호흡을 연신 해대며
이를 악물고 마지막 문제까지 풀어냈다.
마킹을 끝내며 안도의 숨을 내쉬던 순간,
어느새 종 치기 5분 전.
한나는 무심코 답안지를 다시 들여다봤다.
1번 5, 2번 4. 5번에... 응?
5번 답이 비어있었다.
답안지는 6번부터 체크되어 있었다.
스물다섯 문제인데, 26번까지 답 채워져 있었다.
그제야 한나는 답안지가 밀려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럴 수가.’
중학교 때도 하지 않았던 실수였다.
심장이 쿵 내려앉더니 다시 손이 덜덜 떨렸다.
한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저, 답안지 교체요!”
감독교사가 다가왔다.
“시간이 거의 다 됐는데, 괜찮겠니? 종 치면 더 못 고쳐.”
대꾸할 겨를도 없이 한나는 새 답안지를 낚아채듯 받아 들고 다시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급한 손끝은 또다시 실수를 만들었다.
“죄송한데, 다시 할게요.”
목소리는 이미 울음이 목 끝까지 차올라있었다.
교사 또 다른 답안지를 내밀며 난감한 듯 말했다.
“종 치면 더 이상 작성할 수 없어. 알지?”
그 말이 한나에게 들어올 리가 없었다.
눈앞에 숫자들이 마구잡이로 겹쳐 보였다.
‘이건 아니야, 다시 써야 해.’
펜을 쥔 손이 걷잡을 수 없이 바들바들 떨렸다.
‘딩동댕동~’
종이 울렸다.
답안지는 절반도 채 채우지 못했다.
“그만. 더 쓰면 부정행위야!”
교사는 답안지를 거두려 했고, 한나는 내주지 않았다.
“잠시만요! 이것만요! 하나만 더요!”
울부짖는 목소리가 교실의 공기를 찢었고,
반 아이들은 숨을 죽였다.
짧은 그 몇 분이, 한나에겐 억겁처럼 길었다.
결국 한나는 부정행위로 처리됐다.
원칙대로라면 전 과목 0점이었지만,
평소 아이의 모범적인 태도를 참작해 수학만 0점으로 처리했다고 학교 측은 전해왔다.
“답안지 늦게 낸 게 왜 부정행위예요?”
한나의 부모님은 강하게 따져 물었지만, 규칙은 분명했다.
종이 친 뒤의 답안 작성은 명백한 부정행위였다.
게다가 그 장면은 반 아이들 전원이 목격했다.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큰 문제였다.
한나는 좌절했다.
무엇보다 억울했다.
누굴 탓할 일도, 변명할 여지도 없었다.
그래서 더 억울했다.
여태 큰 죄짓지 않고 성실히 살아왔는데,
죄가 있다면 열심히 산 죄밖에 없는데,
왜 이런 일이 나에게 닥쳤을까.
고등학교 첫 내신이 엉망이 되면서
오랫동안 마음속에 그려왔던 대학은 멀어졌다.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버렸으니
그다음 단추는 아무리 해도 어긋날 것만 같았다.
중간고사가 끝난 뒤,
한나는 울다 지쳐 학교에 가지 않았다.
밥도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고,
눈물인지 콧물인지 모를 게 하루 종일 흘렀다.
곁에서 보던 부모의 마음도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시간은 흘렀고,
일주일쯤 지나자 눈물도 말라버렸다.
친구들에게 온 문자 메시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한나는 그것들을 하나씩 읽으며 답장을 보냈다.
정신이 들자 우습게도 허기가 먼저 찾아왔다.
“엄마, 나 배고파.”
아이의 한마디에 엄마는 헐레벌떡 나가 평소라면 기름지다 먹지 말라고 만류할 피자, 마라탕, 떡볶이 따위를 잔뜩 사 들고 왔다.
치킨 한 조각을 베어 물자, 뜨거운 기름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입안에 맛있는 게 들어오니 난장판이던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인생이 끝난 줄 알았는데,
별일 아니었나 싶었다.
‘다시 하면 되지. 어쩌겠어.’
그렇게 한나는 체념하던 참이었다.
그때, 옆에서 엄마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한나야, 우리 자퇴하면 어떨까?”
한나는 너무 놀라서 씹던 치킨 조각을
엄마한테 뿜을 뻔했다.
자퇴라니.
지금 우리 엄마 입에서 나온 말, 맞는 거지?
“아빠랑 얘기해 봤어. 1년 쉬면서 수학은 과외로 보강하고, 남는 시간엔 우리 여행도 다니자. 그리고 내년에 다시 하자.”
엄마의 눈빛은 이미 결심을 끝낸 사람의 것이었다.
“새로 시작하자. 네가 원하는 대학, 다시 도전해야지.”
그 말에 한나는 고개를 들었다.
며칠간 가라앉아 있던 얼굴에 서서히 피가 돌았다.
실수를 지우고, 인생을 다시 쓸 수 있다면—
‘별수 없다’는 체념은 자취를 감추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달콤한 장밋빛 희망만이 들어찼다.
“그래서요, 선생님. 저 다시 도전해 보려고요. 완벽한 내신을 위해서요.”
그간의 일을 털어놓은 한나는 눈이 반짝였다.
봄 햇살처럼 환한 얼굴이었다.
‘완벽한 내신’이라.
그 단어가 어쩐지 마음을 서늘하게 스쳤다.
나는 말없이 교무실 냉장고 문을 열어 비타민 음료 하나를 꺼내 아이에게 건넸다. 한나는 시원하게 그걸 한 모금 마시더니,
“저 진짜 이번 생은 망한 줄 알았다니까요. 엄마 덕에 살았어요.”
하고 환하게 웃었다.
그날,
한나는 그렇게 가벼운 발걸음으로 교무실을 나섰다.
복도 끝까지 멀어져 가는 아이의 뒷모습이
햇빛 속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한참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남겨진 내 마음은 이상하게 무거웠다.
답답함인지, 죄책감인지, 미안함인지—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한나야, 자퇴는 너를 위한 길이 아닐지도 몰라.’
믿기 어렵겠지만,
요즘은 내신을 다시 만들겠다며 자퇴를 택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한나처럼 억울한 실수를 한 경우도 있지만, 단지 시험을 망쳤다는 이유만으로 ‘처음부터 다시 하겠다’며 학교를 그만두는 아이도 있다.
좋은 대학을 위해서라면 오수, 육수쯤이야—
내신 한 번 삐끗하면, 미련 없이 자퇴해 버린다.
어른들이 만든 세상의 기형적인 풍경들.
열일곱, 열여덟.
하루, 아니 한 시간조차 허투루 보내기 아까운
그 고운 청춘이 모조리 입시로 흘러간다.
흔히 인생을 달리기에 비유한다.
출발선은 출생, 결승선은 죽음이라고 한다면
그 사이사이엔 입시, 취업, 결혼 같은 '깃발'이 꽂혀 있다.
반드시 넘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대개는 거쳐 가는 생의 과업들.
한국에서라면 그 첫 깃발은 열에 아홉, 대학 입시다.
문제는 아이들이 이 첫 깃발을 결승점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초·중·고 열두 해를 꼬박 달려와 마주한 그 관문 앞에서, 그 너머에 또 다른 길이 있으리라곤 좀처럼 상상하지 못한다. “일단 대학부터 가자.”는 어른들의 말이 그 착각을 더 단단히 만든다.
하지만 대학은 결승점이 아니다.
그 너머에도 깃발은 계속 서 있고,
숨 고를 틈도 없이 또 다른 출발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정작 중요한 건,
첫 깃발을 얼마나 완벽히 넘느냐가 아니다.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서는 법,
그걸 배우는 일이다.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헛디딘다.
억울한 일도, 뒤처지는 순간도, 견딜 수 없는 실패도 있다.
그 모든 걸 제 몫으로 감당하며 달릴 때,
비로소 알게 된다.
자기 인생의 결승선은
남이 세워준 깃발 너머에 있다는 것을.
한나는 첫 깃발 앞에서 넘어졌다.
출발하자마자 삐끗한 것이다.
그것도 억울하게, 부정행위라는 낙인을 쓰고,
원하던 대학은 멀어졌다.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작은 실수였는데,
그 대가가 너무 가혹했다.
부모 마음은 오죽했을까.
열심히 산 죄밖에 없는 딸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린 선택이 자퇴였다.
“실패해도 괜찮아.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어.”
그 다정한 위로 뒤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덮어주고
아이를 다시 출발선에 세우려는 마음이 숨어 있다.
하지만 한나가 돌아갔다고 믿은 그곳은
부모가 그어준 가짜 출발선일 뿐이다.
인생의 달리기엔
되돌아갈 길이 없다.
시간은 거꾸로 흐르지 않고,
이미 겪은 일은 없던 일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생을 완주하는 유일한 방법은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것.
상처를 안고, 절망을 끌어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달려가는 일이다.
첫 깃발에서 그걸 배우지 못하면,
그다음 깃발 앞에서 더 큰 값을 치르게 된다.
한나에겐 기회가 있었다.
헛디딘 자기 발을 원망하며,
앞서가는 친구들을 보며 속을 끓이다가,
넘어진 자리에서 마음껏 울고,
끝내 “별수 없지.” 하며 다시 일어설 기회.
아이러니하게도, 그 기회를 빼앗은 건 부모였다.
한나는 내년에 더 큰 압박 속에서 시험을 치를 것이다.
불안이 켜켜이 쌓인 그 자리에서
또다시 무너진다면—
그때는 부모를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무엇보다 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까.
내신을 위해 자퇴하고,
삼수를 당연시하는 N수의 풍경.
그 뿌리는 모두 같다.
그저 한 단계의 과정일 뿐인 깃발을
결승점이라 믿게 만드는 사회,
그리고 언제든 출발선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부모들.
언제든 새 출발선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환상에 젖은 아이들은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그러다 현실 앞에서 그 환상이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
“이번 생은 망했어.”라는
그 자조 섞인 농담이
어느새 진담이 된다.
결국 아이들은
결승점에 닿기도 전에,
상처투성이로 나가떨어진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달리는 지하철에 지친 몸을 맡겼다.
창밖으로 한강의 불빛이 느릿하게 흘러갔다.
한나의 선택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걸 탓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입시의 세상은 이미 너무 복잡해져,
예전처럼 수능 하나만 잘 봐서 될 일이 아니었다.
생활기록부, 각종 대외 활동, 그중에서도 줄 세우기의 전형인 내신의 무게는 해마다 더 무거워졌다.
과도한 경쟁 탈피, 행복한 십 대, 청소년의 꿈과 끼를 찾아준다는 말들이 떠돌지만,
실제의 입시는 한 번의 실수가 되돌릴 수 없는 낙인이 되는 구조에 가깝다.
지하철이 강을 벗어나자
문득 나 또한 부모임을 떠올린다.
내 아이가 한나처럼 넘어졌다면,
그 억울함과 좌절을
과연 스스로 감당하게 둘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부모라면 차라리 내가 그 고통을 대신 겪고 싶을 테니까.
게다가 방법을 알고, 그럴 힘까지 있다면 더더욱.
하지만 그건 아이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이 아니다.
그저 뒤로 미루는 것뿐이다.
아니, 어쩌면 이 세상에
제 발로 서지 못하게 아이를 불구로 만드는 일인지도 모른다.
사랑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기꺼이,
저지르게 되는 가슴 아픈 일들.
불빛이 멀어지고,
창밖이 어둠으로 잠길 즈음—
입안에서만 맴돌다,
끝내 삼켜 한나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속으로 삼켰다.
미안해, 한나야.
네 잘못이 아니다.
이건, 어른들의 잘못이다.
무거운 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오늘은 더 이상 ‘나이스한 교사인 척’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입안에 쓴 기운이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