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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한 학부모 앞에서 살아남는 법

# 나이스한 교사인 척, 속으론 욱 ep.3

by 사랑의 생존자



※ 이 글은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한 에세이입니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여러 사례를 종합해 재구성한 가상의 인물입니다.



“안녕하세요? 저, 정대만이 아빠 되는 사람입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울린 전화는
집 근처 역에 도착할 때까지도 끝날 기미가 없었다.


“선생님, 요즘 교사는 권위가 너무 없어요.
애들은 매로 다스려야 정신을 차린다니까요?”


아닌 밤중의 ‘매’ 타령에,
체념 섞인 한숨을 삼키며
역 근처 벤치에 조용히 앉는다.

눈을 감고 오늘 오전의 장면을 되감기 시작한다.




1교시 쉬는 시간,

대만이와 대협이가 말다툼을 벌이더니, 금세 몸싸움으로 번졌다. 때마침 복도를 지나던 체육 선생님 덕에 큰 사달은 면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둘은 생활지도실로 끌려갔고 20분 남짓, 각자 있었던 일을 종이에 적었다. 담당 선생님은 정황을 파악한 뒤 서로 사과까지 시켜 다시 교실로 돌려보냈다.


쭈뼛거리며 나간 대만이와 대협이는, 그 또래 남자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다음 쉬는 시간 축구공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언제 그랬냐는 듯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 문제는 그걸로 끝났지만,

어른들끼리는 또 다른 문제였다.


특히 대협이의 왼쪽 눈가에 선홍빛 멍이 또렷이 올라와 있어 내심 긴장했는데, 다행히 부모님은 “에이, 남자애들이 그럴 수도 있죠” 하고 웃으며 넘기셨다.


일이 의외로 순조롭게 끝나는 듯했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씨가 튀었다.


생각지도 못한 대만이 아빠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목소리로 “애들은 때려야 한다”는 알 수 없는 말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한 시간 가까이 통화는 겉돈 채였지만,

나는 끝까지 귀를 기울였다.

터져 나오는 말 무더기 속 어딘가에 있을,

대만이 아빠가 ‘진짜 화가 난 이유’를 찾아야 했다.

설마 정말 때리지 않아서 화를 내는 것은 아닐 터.


“생활지도 하시는 선생님도 고생스러우실 텐데,

한 번 맞으면 끝날 일을 이렇게 처리합니까!”

순간, 내 동공에 미세한 번쩍임이 스쳤다.

중요한 단서가 나왔다.


‘한 번 맞으면 끝날 일을’

대만이 아빠는 학교가 아이들 싸움을 처리한 절차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이다.

“아버님, 혹시 대만이가 조사받는 과정에서 불쾌하셨던 부분이 있었던 걸까요?”


“… 아니, 선생님. ‘조사’라뇨.

사내놈들 한 번 치고받았다고… 거기다 애들한테 준 종이를 ‘사안조사서’라고 부른다던데, 무슨 경찰 수사도 아니고. 제가 교육청 규정을 찾아보니까 이거는 도무지…”


드디어 닿았다.

분노의 진짜 지점.


“말씀을 들어보니, ‘사안조사서’라는 용어에 속이 상하셨군요.”


시의 정적.

그리고 확신.


“…속상한 게 아니라요. 얘가 학교폭력 가해자도 아닌데 그딴 종이를 받았다니까— 솔직히, 개빡쳤습니다.


개빡쳤다니.

순간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었다.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대만이 아빠는 ‘사안조사서’라는 단어에 꽂혀 폭발하고 있었다.


“이건 교육이 아니라 수사 아닙니까! 내 아들이 무슨 범죄자입니까?”


곧이어 “교육청에 정식 민원을 넣을 수도 있습니다.”라며 낮은 으름장까지 덧붙여졌다.

‘사안조사서’는 교육적 목적의 문서로, 정해진 절차에 따라 작성되는 것이라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쯤 되면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말싸움은 소용없다.

지금 필요한 건 설득이 아니라,

성난 불길을 가라앉히는 일이다.


이럴 땐… 역시 그 방법을 사용해야 하겠지.



작은 체구에,

카리스마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웬만한 학부모들 눈엔 그저 ‘만만한’ 교사에 불과한 나.


그러나 살아남는 자가 강자라 했던가.

그런 나도 이 바닥에서 10년을 버텨왔다.


대단찮은 조건 속에서도

나름의 생존 스킬들을 하나둘 쌓아 왔으니—

대만이 아빠에게 꺼낼 첫 번째 비장의 카드는

이름하여, '침묵권법'이다.



나는 잠시 휴대폰을 귀에서 떼고,

숨을 길게 들이쉰 뒤,

다시 귀에 댄다.

그리고 —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스피커에서는 여전히 격앙된 대만이 아빠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아직 십 대 아이들에게 범죄자 취급을 하는 그런 종이를 주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


“저희 때는 안 그랬어요. 그냥 한 번 매 맞는 게 낫지, 애를 범죄자로 낙인찍다니요?”


“…”


“학교에서 이래도 되는 겁니까? 이래 가지고 교육이 제대로 되냔 말입니다.”


“…”


“아니, 차라리 매를 들라고요, 매를! 예?!”


“…”


‘침묵권법’의 핵심은 하나다.

잡음 하나 없는, 완전한 침묵.

“예, 그렇군요” 따위의 추임새도, 주변 소음도,

심지어 숨소리조차 사라진—

그야말로 무결점의 공백.


이 침묵의 벽 앞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본능적으로 묻는다.

‘전화가 끊겼나?’


“아니, 대체 대한민국 교육이… 여보세요?”


‘침묵권법’을 발동하더라도, ‘나는 계속 듣고 있다’는 신호는 반드시 보여줘야 한다. 나는 재빨리, 짧고 공손하게 답한다.


“예, 아버님.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곧장 다시, 침묵.


전화가 끊기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상대는

이번엔 슬그머니 두 번째 의문을 꺼내 든다.

‘이 사람… 화가 난 건가?’

“아, 선생님— 기분 나쁘신 건 아니죠…?”


나는 짧고 명료하게,

그러나 상냥함의 최대치를 담아 답한다.


“그럴 리가요. 아닙니다.”


그리고 다시 — 침묵.


두세 번만 이 과정을 반복하면 분노는 서서히 잦아든다. 하고 싶은 말은 다 쏟아낸 데다, 상대가 듣고 있다는 것도 명백히 알겠는데, 혼자 연설하는 기분이 들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힘이 빠지는 것이다. 이건 내 경험상 거의 법칙이다.


게다가 아무리 유별난 학부모라도

매일 아이를 맡겨야 하는 담임 앞에서

진상력을 풀파워로 쓰는 일은 드물다.

대부분은 70퍼센트 즈음에서 멈추기 마련.

“저… 물론 이 일들이 담임 선생님 잘못이라는 건 아닙니다. 대만이 말로는 선생님이 화내지 않고 잘 타일러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목소리에 가득 담겼던 분노가 풀리고,

약간의 머쓱함까지 묻어난다면 —

이제 내가 입을 열어도 된다는 신호다.


하지만, 긴 해명은 금물이다.

수습하는 말 정도면 충분하다.

“아버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사안조사서’라는 표현 때문에 마음이 상하신 것 같네요. 이 부분은 학교장님께 건의해 보겠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아, 네. 뭐….”


말끝을 흐리며,

이어질 전형적인 레퍼토리는 아마도—


“우리 대만이가, 담임 선생님이 참 좋은 분이라고 하더군요.”


그렇지, 나왔다.

아무 맥락도 없는, 뜬금포 칭찬.


감정이 완전히 가라앉고 이성을 되찾은 뒤, ‘혹시 나 때문에 저 선생이 우리 애를 미워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이 올라올 때 터져 나오는 본능적인 멘트다.


여기까지 왔다면, 일은 거의 끝난 셈이다.


나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본다.

벤치 앞 풍경은 어느새 축축하게 어두워져 있었고,

뱃속에서는 진즉에 지난 배꼽시계가 요란하게 울려댔다.


휴대폰 화면을 보니,

통화 시간, 1시간 58분.


대만이 아빠에게 쏟아부은 감정 에너지

늦어진 퇴근의 피로감과,

어디에도 풀 길 없는 억울함

짜증으로 슬금슬금 올라온다.


이 상태라면,

대만이를 볼 때마다

뒤통수에 몰래 저주라도 날릴지 모른다.


삐뽀, 삐뽀.

머릿속에 경고등이 켜진다.



교직 생활을 하며 내가 스스로 세운 규칙 하나.

“학부모에게 받은 감정을 아이에게 전가하지 않는다.”


고상한 직업적 소명의식에서 나온 원칙은 아니다.

단지—

부모가 교사에게 잘한다고 아이를 예뻐하는 것도 치사하지만, 부모가 교사에게 못한다고 아이를 미워하는 건, 그보다 더 치사한 짓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학부모는 일이 있을 때만 보면 되지만

매일 마주치는 아이에게 미움을 품는 순간,

지옥은 내 일상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치사해지고 싶은 마음이 든다.

바로, 지금처럼.


이럴 때 쓰는 기술도 있냐고?

물론이다.




대만이 아빠에게 두 번째로 사용할 기술의 원칙은 단순하다.

‘받은 만큼 돌려준다.’



일명 ‘복수혈전 권법’.

학부모에게 복수라니, 언뜻 비윤리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아이에게 화풀이하는 것보다, 분노의 발원지인 부모에게 되돌려주는 편이 낫다는 것이 내 방식의 현실 윤리다.


위험 부담은 있지만, 효과는 즉각적이다.

즉— 대만이 아빠 때문에 대만이를 미워하지 않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소리다.


나는 긴장으로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를 다잡고, 짐짓 밝고 경쾌한 어조로 회심의 한마디를 날린다.

“어머, 안 그래요. 저도 가끔 아이들 때문에 빡치고—

아, 아니! 화가 날 때도 있거든요. 호호.”

‘빡치고’에 강세가 실린 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본심이었다.

솔직히, 그 말은 나도 기분이 나빴다.

‘개’를 붙이지 않은 것은 나의 마지막 남은 품위.


잠시의 침묵.

이어지는 헛기침 소리.


“허허… 애들 가르치다 보면 화가 날 때도 있겠죠. 그럼 선생님, 퇴근하셔야죠. 여기서 끊겠습니다.”


뚝—


전화를 끊자 꽉 조여 있던 숨이 한꺼번에 풀렸다. 조금 전 대만이 아빠의 당황한 목소리가 떠오르자 가슴 어딘가에 쌓였던 체증이 스르르 내려갔다. 성공적인 복수혈전이었다.


대만아 —

선생님이 너를 내일도 좋아할 수 있을 것 같다.


집으로 가는 길, 좋아하던 햄버거집에 들렀다. 오늘은 특별히 소고기 패티를 하나 더 얹었다.

고소한 마요네즈와 탱글한 육즙이 퍼지는 순간,

마음 한구석에 숨어 있던 찝찝함마저 스르르 녹아내렸다.


좋아.

이걸로, 대만이를 미워할 1%의 가능성조차 사라졌다.


지쳐도 발걸음은 가벼운 퇴근길.

아무도 모르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일류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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