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이스한 교사인 척, 속으론 욱 ep.4
※ 이 글은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한 에세이입니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여러 사례를 종합해 재구성한 가상의 인물입니다.
첫 발령지는 여중이었다.
‘여자아이들만 있는 곳에서 잘 버틸 수 있을까.’
걱정과 달리, 의외로 장점이 많았다.
스승의 날이면 정성스러운 손글씨 편지가
책상 위에 차곡차곡 포개져 있었고,
프린트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일도 없었다.
가끔은,
나보다 인생을 더 오래 산 사람처럼
속 깊은 말을 건네는 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세상사 늘 그렇듯,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이다.
‘친구’같이 좋은 아이들이 있는 만큼,
싸우기 버거운 ‘적수’들도 포진해 있었다.
그리고 그 시절,
내 앞에 최강의 상대가 나타났다.
지금 생각해도
이가 으드득거릴 만큼
한 번 붙으면
정신을 쏙 빼던 아이.
그녀의 이름은 —
강백희였다.
여중에서는 무리가 남녀공학보다 훨씬 뚜렷하게 나뉜다. 그중 교실의 공기를 움켜쥔 아이들이 있다. 나는 속으로 그들을 ‘1무리’라 불렀다.
‘1무리’에 속하려면 공부든, 얼굴이든, 아니면 눈치든, 또래 속에서 힘이 되는 무기를 하나쯤은 갖춰야 했다. 가끔 그걸 둘, 셋씩 가진 아이가 있었고, 그런 아이가 대장이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우리 반 대장은 백희였다.
그녀가 웃으면 모두가 따라 웃고,
입술을 굳히면 교실의 공기도 같이 굳었다.
또래보다 영리하다 못해 영악한 백희는, 무리에 속하고 싶은 십 대의 필사적인 마음을 능숙하게 이용할 줄 알았다.
그녀의 권력 유지법은 의외로 단순했다.
일명 ‘순번제 왕따.’
백희 무리는 일곱이었다.
늘 한 명이 남는 홀수.
학교는 ‘무리’ 생활의 연속이다. 급식 줄을 설 때, 수업 시간에 조를 짤 때, 수련회 방을 고를 때, 심지어 화장실을 가는 사소한 순간에도 백희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대상을 골랐다.
“너 저리 가” 같은 촌스러운 말은 하지 않는다.
그저 앞장서 천천히 걸어갈 뿐이다.
말없이 속도를 조절하고,
의미 있는 눈짓을 흘리고,
자리 하나 비워두면
누군가는 자연스레 떨어져 나갔다.
그걸 두세 번만 겪으면 아이들은 깨닫는다. 무리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백희 눈에 들어야 한다는 것을.
백희의 잔혹하고 교묘한 행태에 나는 그저 주의를 기울일 뿐, 섣불리 손을 대진 않았다. 괜히 건드렸다가 더 깊이 숨어버리는 경우도 있으니까.
게다가 백희는 표면적으로 ‘괴롭힘’으로 보일 행동은 절대 하지 않았다. 심증은 잔뜩이었으나, 증거는 딱히 없었다.
하지만,
뭐든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어느 점심시간,
반장이 조용히 나를 찾아왔다.
아이가 내민 휴대폰 화면엔 수십 장의 SNS 캡처본이 빼곡했다. 백희네 무리는‘순번제 왕따’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이제는 무리 밖 아이들까지 끌어들여 SNS로 저격하기 시작했다. 첫 타깃은 백희 앞에서도 기죽지 않던 우리 반 반장이었다.
“선생님, 저는 괜찮아요.
근데… 다른 애들까지 끌어들이는 건 안 되잖아요.
그건 막아주세요.”
또박또박 단단한 목소리.
기특한 녀석.
나는 반장의 머리를 슬쩍 쓰다듬고, 책상 깊숙이 숨겨둔 페레로로쉐 하나를 꺼냈다. 아이는 그것을 받아 들더니, 잠시 머뭇하다가 “걔네… 선생님 욕도 했어요.” 하곤, 황급히 교실로 돌아갔다.
몇 분 뒤,
반장에게서 추가 캡처 파일이 도착했다.
내 이름은 없었으나,
누가 봐도 나였다.
참신하진 않지만, 정성은 가득한 욕이었다.
나는 전투욕이 오를 때 웃는 편이다.
천천히 올라가는 입꼬리에 맞춰
속으로 되뇌었다.
너네, 딱 걸렸다.
방과 후, 백희와 아이들을 생활지도실로 불렀다.
“… 결론적으로 너희가 하고 있는 건 명백한 사이버 학교폭력이야. 게다가—”
나는 잠시 말을 멈춘 뒤, 프린터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따끈한 캡처본 묶음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걸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겼다.
사각— 사각—
종이가 미끄러지듯 넘어가는 소리가 교실을 칼날처럼 갈랐다.
아이들의 눈동자가 종이와 내 얼굴을 바쁘게 오갔다.
“이 정도면 생활기록부에 올라가도 충분하겠다. 그치?”
나는 턱을 괴고 종이 모서리를 툭툭 치며 낮게 읊조렸다.
“학폭위 가해자로 말이야.”
‘학폭위’라는 말이 떨어지자, 서로를 쳐다보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교실에서 우르르 몰려다닐 때는 우쭐댄다지만, 그래봤자 열다섯 애송이들이다.
이 정도면 알아들었겠지 싶어 슬슬 자리를 정리하려던 순간, 백희가 사납게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그래봤자 끽해야 학폭 1호 사안, 서면 사과 정도겠죠. 열어요. 학폭위.”
부릅뜬 눈에서 ‘여기서 절대 질 수 없다’는 기세가 느껴졌다.
학폭위 절차를 줄줄이 꿰고 있는 저 유식함,
어른 앞에서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배짱.
여왕벌의 압도적인 기개 앞에서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백희가 벌떡 일어섰다.
턱을 살짝 올리고,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나를 훑더니
긴 머리를 가볍게 툭 튕기며 조용히 말했다.
“얘들아, 가자.”
그다음 순간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흩날리는 백희의 머리칼,
긴 속눈썹 그림자,
주춤거리다 우르르 따라 나가는 아이들,
담임인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문을 열고 나가려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대로 두면, 담임으로서 1년은 끝장난다.’
중학생과 싸움이라니.
애초에 만들지 말았어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미 싸움은 시작됐고,
이건 반드시 이겨야 한다.
그리고 싸움은, 모름지기—
나는 단전에 힘을 모으며 문 쪽으로 나가는 아이들을 향해 최대한 크게 외쳤다.
“거기… 안 서????!!!!!!”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
복도를 쩌렁 울리는 내 목소리에 순간, 공기가 쫙 갈라졌다. 아이들은 혼비백산해 “죄송합니다”를 연달아 쏟아냈고, 백희조차 문 앞에서 굳어 있었다.
“… 강백희 빼고 다 나가.”
아이들이 우르르 빠져나간 뒤, 교실엔 우리 둘만 남았다.
“너, 특목고 간다며? 진짜 학폭위 열까?”
“…”
“부모님께 이 캡처 그대로 보내도 될까?”
“…”
백희는 바닥만 노려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일부러 빙긋 웃으며 “야, 그런데— 내 욕도 했더라?”라고 빈정거리니 그제야 백희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매서웠다.
나는 시선을 슬쩍 피하며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학폭위… 안 열 수도 있고,
부모님께 말 안 할 수도 있긴 하다만…”
순간, 백희의 어깨가 움찔했다. 한참을 입술만 잘근잘근 씹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걸렸다.
나는 그 자리에서 각서를 받아냈다.
SNS 활동 즉시 중단.
‘순번제 왕따’ 전면 금지.
지장까지 찍게 했다.
그걸 찍고, 백희는 앙칼지게 말했다.
“됐죠?”
되긴 뭐가 됐냐.
중학생과의 싸움엔 어른의 체통 따윈 사치다. 나는 목소리를 낮추고 아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야. 내 앞에서 대장질하지 마.
우리 반 대장은 나야.
나대지 말라고. 알겠어?”
백희는 멍한 얼굴로 잠시 서 있다가
작게 “네…” 하고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참았던 숨을 토하듯 뱉었다.
아휴.
하마터면 질 뻔했다.
열다섯에 저 기세라니.
크게 될 아이다.
뭐, 좋은 쪽일지, 나쁜 쪽일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 그 뒤로 백희와 아이들은 조용히 학교생활을 이어갔다. SNS 저격은 약속대로 즉시 멈췄고, 내 말도, 반장 말도 고분고분 잘 따랐다. 지들끼리 하던 ‘순번제 왕따’는 실제로 어떻게 돌아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귀에 들어오는 건 없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기운이 보이면,
백희를 조용히 불러 딱 한마디만 하면 됐다.
“니네 엄마한테 이른다.”
그렇게 무사히 시간이 흘러,
드디어 학기의 마지막 날 종업식.
아이들을 모두 보내고
콧노래를 부르며 교무실로 돌아오니
교탁 위에 왠 작은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빨간 체리향 립밤.
그리고 그 옆에 손글씨 쪽지.
‘나이 들수록 입술에 뭐라도 발라야 해요.
안 그러면 더 늙어 보여요.
이미 늦은 것 같지만.’
백희였다.
거울을 힐끗 보니, 찬바람에 입술이 낙엽처럼 하얗게 갈라져 있었다. 체리빛 립밤을 조심스레 얹으니 전에 없이 생기가 돌았다.
고마워야 하는 걸까.
근데… 왜 이렇게 얄밉지.
마지막 라운드에서 KO 당한 기분.
체리향의 굴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입술을 천천히 쓱 닦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집에 가서… 강백희 저주 인형이나 하나 만들까.
가끔은,
교사도 중학생처럼 싸우고 싶다.
정말, 아주 가끔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