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전문 변호사가 건넨 말

ep05 지옥을 탈출한 여자

by 윤은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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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속을 어떻게 버틴 거에요?”


트라우마로 난 삶이 묘하게 망가졌다. 점쟁이 말대로 그와의 결혼이 마치 없었던 일처럼 잘 살고 싶었는데.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나를 사랑으로 감싸줘도 회복이 안 됐다. 예전의 내가 어땠는지 기억도 잘 안 났다.


하지만 이혼 과정을 밟아야 했다. 가정폭력으로 이혼하게 됐기 때문에 변호사를 통해 절차가 진행됐다. 변호사를 만나기 전 그날의 사건들과 가정폭력 정황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경찰을 통해 옥상에서 뛰어내린 파일까지 같이 보냈다.


변호사를 만나기 전. 떨렸다. 내 인생에 변호사를 만나는 날이 올 줄 몰랐다. 20년 넘게 이혼을 전문으로 맡았다는 변호사는.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칼같이 길이를 맞춘 단발에 검은색 정장. 그리고 총명한 눈빛. 전형적인 법조인 스타일 같았다.


“법률사무소 장수 송하나 변호사입니다.” 친절하게 웃으며 내게 명함을 건네는데. 묘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종이가 꽤 빳빳한 명함을 받고.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부담스러울 만큼 새하얗고 깔끔한 사무실에서 둘이 어색하게 앉았다.


변호사는 나를 취재하듯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폭언이 시작된 게 언제부터인지, 그날 어떤 상황이었는지, 혹시 싸운 상태였는지, 연애할 때는 이런 적 없었는지. 등을 물었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경찰이 나에게 질문한 것과 유사했다.


“신빛나씨. 녹음 파일을 들어보니 폭언이 처음은 아닌 것 같은데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됐나요?”


마치 지옥의 시작점이 언제부터였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결혼 초부터...시작된 것 같아요.”


신혼여행 때부터 그의 분노조절장애는 알아차렸다.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타듯 널뛰기하고. 쌍욕이 일상이었다. 감정선이랄 것이 없었다. 갑자기 화내다가 욕하다가 또 진정되고. 매 순간 눈치 보게 만들었다.


변호사는 나를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혹시...연애를 짧게 하고 결혼을 하셨나요? 남자분의 성향을 모르고 한 것 같아서요.”


굉장히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연애하는 동안은 저를 향하는 폭언, 폭력은 없어서... 잘 모르고 결혼하긴 했어요.”


사계절은 만나봐야 한다는 주변 사람들의 조언에도. 난 괜찮을 거라 믿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욱하는 성향이 있는 걸 알고 있었지만. 사랑으로 대하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내가 아닌 타인을 바꿔보겠다고 생각한 것이... 나의 착각이고 오만이었다.


“근데 혹시 이분 정신과 진료 기록이 있을까요? 분노조절장애가 심한 것 같은데 일상생활이 가능한 수준이었나요?”


진짜 궁금한 표정이었다. '이 정도로 폭력적인 사람이 생활이 가능한건가?'라는 느낌이었다.


“정신과에 간 적은 따로 없는 것 같아요.”


그는 스스로가 분노조절장애인 것은 알았지만. 고칠 생각은 없었다. 사회생활은 가능했다. 선택적인 분노조절장애였으니까. 자신보다 강한 위치에 있는 사람 앞에서는 분노 조절이 자동으로 됐다. 자신이 통제 가능한 수준의 사람 앞에서만 그 병은 발현됐다.


“제가 20년 넘게 이혼 사건을 맡았지만 이렇게 심한 사건은 처음 보는 것 같아요.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적은 없나요?”


사실 그가 내게 쌍욕을 하는 걸 가족에게 알릴 수 없었다. 연애가 아니라 결혼을 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이걸 알리는 순간 가족과 가족이 엮인 결혼 관계를 유지할 수 없을뿐더러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 자체가 치욕이었다.


“결혼하고 나서 제가 몸이 계속 안 좋으니까 결혼 생활이 편하지 않다는 것은 다 알고 있었어요. 근데 이렇게 폭언, 폭력을 한다는 걸 차마 말할 수 없었어요.”


얘기를 꺼내면서도 울컥했다. 그리고 비참했다. 처음 보는 변호사 앞에서 불행했던 결혼 생활을 적나라하게 꺼내야 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모든 상황을 주변에게 알리고 도움을 요청해야 했지만. 상식적으로 행동하기 쉽지 않았다.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순간은 어떤 상황이었나요?”


아찔했던 지옥에서 탈출한 엔딩을 물었다. 술 취해서 들어온 그가 집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박살내고. 나를 밀치면서 쫓아내고. 맨발로 옥상에 올라가 경찰에게 전화했다가. 그가 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소리에 놀라서 뛰어내린 이야기를... 마치 드라마 에피소드 얘기하듯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때 뛰어내리지 않으면 그에게 잡혀 죽을 것 같았어요.”


말을 하면서도 실감 나지 않았다. 그때의 상황도. 지금 내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것도. 생생한 건 몸이 기억하는 감각이었다. 차가웠던 새벽바람과 발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이제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감에 휩싸여 심장이 멎을 것 같았던 긴장감.


“정말... 말 그대로 지옥 속을 살다 나오셨군요.”


변호사가 말하는 ‘지옥’이라는 단어에 한동안 할 말을 잃었다. 나의 결혼 생활을 가장 잘 표현한 단어였지만 왠지 모르게 가슴을 후벼파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평생 살 바에는 그냥 증발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짧은 침묵 뒤에 겨우 입을 뗐다. 대답한 뒤 멍해졌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현실이 너무 비참했다.


“통계학적으로 볼 때 이혼 사유 중 2위가 가정폭력이긴 한데요... 이번 사건은 마음이 너무 안 좋네요.”


변호사는 나에게 짧은 위로를 전하고는. 최대한 빠르게 이혼 절차가 진행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혼인신고 기준 혼인 기간이 3개월 미만으로 짧을뿐더러 자녀도 없는 상태라 빠르면 2개월 안에 서류까지 정리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신빛나씨. 이름처럼 빛나는 삶을 되돌렸으면 좋겠어요.”


어쩌면 의미없이 건네는 위로일 수 있지만. ‘빛나는 삶을 되돌렸으면 좋겠다’는 단어들이 마음속에 박혀 눈물이 줄줄 흘렀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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