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한울 Jun 15. 2019

퇴사 후 유럽-스페인 마드리드에서

2018. 04. 18

나이 32세. 누구에게는 가장 좋을 때다, 아직 어리다, 많은 것을 해 볼 때다는 소리를 듣고 어떤 누구에게는 치열한 취직 전쟁에서 경쟁력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쓸모가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 걱정을 받을 나이. 눈감고 살라면 눈 딱 감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며 달관하는 자세로 견뎌내야 하는 나이이거나, "에이 썅, 못해먹겠네!" 하고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상사의 면전에 멋지게 사직서를 내고 자유를 찾아 떠나는 꿈에 부푸는 나이.

그런 나이라고 생각했던 30대의 어느 날, 나는 결국 퇴사를 하는 것을 결심했다.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첫 입사일에서 퇴사일까지, 그 16자리 안의 숫자를 벗어나자 나는 더 이상 직장인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줄 알았던 20대에는 대학 입학부터 아르바이트 구하는 것, 친구를 사귀거나 연애하는 것, 전공 공부를 해서 좋은 성적을 받는 것, 취직하는 것, 그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는데 아이러니하게 30대에 나는 그 모든 선택이 쉬웠다. 오히려 20대에는 좀 쉽고, 지금의 선택을 더 신중하고 어렵게 했어야 하는 게 아니었나 원망스러울 만큼.


대학을 갓 졸업한 초짜 새내기의 열정만으로 취직하기 힘든 시절, 유일하게 내 자리를 허락해 주었던 직장에서 나는 나의 20대, 모든 것을 바쳤다. 하지만 그렇게 헌신했던 직장도 그만 둘 때는 그저 모든 게 너무 쉬웠다. 일말의 후회, 걱정, 연민도 없이 정말 '깔끔'하게 정리가 됐다. 홀가분함이 느껴졌지만, 곧 그 자리를 메우는 '공허함' 또한 내 것이었다.

직장에서 견디기 힘들었던 무게, 부담, 갖은 스트레스에서 해방되는 자유는 나를 즐겁게 하고 새로운 '생명'을 얻은 듯했으나 점점 자본주의 사회의 냉혹함을 느끼게 되면서 '생존'에 대한 불안에 침식당하기 시작했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고 했던가. 정말 세상은 그저 공짜로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 밥을 먹여주고, 편히 살게 하지 않았다. 퇴사한 이후에도 난 다시 힘들었고, 숨이 막혔고, 신체적/정신적으로 너무 아팠다. 아파서 고통스러운 나를 단 한 번이라도 아무런 걱정 없이 쉬게 해주고 싶었다. 내가 쉬고자 결심한 이 순간, 두 번 다시 올 수 있을까 싶은 이 순간을 정말 잘 보내고 싶었다. 그런 열망이 나를 지금의 이 곳으로 오게 했다.


최소한의 짐만 가지고, 여자 혼자의 몸으로 여행해도 크게 위험하지 않으면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곳. 항상 TV나 인터넷으로만 접하며 '언젠가는 꼭 가리라, 기필코 가고 말리라' 마음속으로 다짐만 수도 없이 했던 곳. 그렇다. 나는 유럽에 왔다.


누구는 30대에 가장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 나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열심히'라는 말에 지쳤던 나는 청개구리처럼 멈춰 섰다. 멈춰 설 용기를 얻기까지 내가 얼마나 힘들고 아픈지, 제대로 작동하는 곳이 없을 만큼 고장 난 상태인지도 전혀 몰랐다. 다들 그렇게 산다며, 너는 괜찮은 거라고 주변에서 하는 말들에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니, 괜찮지 않으면 안 되는 줄 알았다. 괜찮지 않은 건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괜찮지 않았다. 괜찮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자, 그동안 외면하고 살아왔던 불쌍한 '내'가 보였다. 그 순간 빨리 한국을 떠나야겠다는 강한 열망에 사로잡혔다.


하루 절반의 시간을 비행기를 타고 떠나온 이곳은 내가 꿈꾸던 '유토피아'는 아니었다. 모양새만 다른 '사람 사는 세상'이었다. 물론 이국적인 건물들이 눈 앞에 펼쳐지고, 깨끗하고 맑아 눈이 부신 파란 하늘은 서울에서 보는 것과 확실히 달랐지만 여기도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였다.    

2만 보가 넘게 그저 무작정 마드리드 시내를 걸었다. 특별히 관광을 하거나, 맛집을 찾거나, 외국인 친구를 사귀거나 하는 등의 시간을 보내지 않고 목적지 없이 정처 없이 걷고 또 걸었다. 생각보다 동양계 사람들이 많이 없고, 길에는 읽지도 못하는 글자들이 수두룩했다. 거리를 걸으며 갑자기 외딴곳에 혼자 뚝 떨어진 기분이 들면서 외로움이 엄습했다. 한 번도 혼자 여행을 하면서 '고독하다'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그렇게 떠나오고 싶어 했던 유럽에서 난 처음으로 고독함을 느꼈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고, '나'에게 관심 없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조용히 나를 들여다보았다. 순간, 그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그 모든 것들이 결국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의 시선과 평가, 기대감에 맞춰 살며 조금씩 '나'의 모습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잃어버렸던 것 같다. 나이는 먹었지만, 10대 때처럼 나는 여전히 내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전혀 알지 못했다. 인생이라는 도화지에 열심히 그림을 그려왔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아무것도 그려진 게 없는 텅 빈 하얀색 도화지였다.


참 오랫동안 '나'를 나로 세우며 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걸 비우고 내려놓으니, 이제야 보이는 것도 있는 것 같다. 앞으로 남은 40일의 이 여행이 나를 얼마나 더 비워내 줄지, 그렇게 비우고 비워서 결국 남게 되는 게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그렇게 다 비우고 나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