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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한울 Aug 05. 2019

퇴사 후 유럽 - 크로아티아 스플리트에서

2018.05.26

스플리트에 도착했다. 이제 정말 이 여행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일이면 나는 두브로브니크에 있을 테고, 그곳은 이 유럽여행의 종착지이다. 믿어지지 않은 시간들이 흘렀고, 하루하루 아쉽고 꿈만 같은 순간들이 계속되고 있다. 


자다르의 한적함에 취해 있다 스플리트에 오니 버스 터미널에서부터 '이 곳은 관광지다'라는 게 느껴졌다. 수많은 인파와 내딛는 걸음마다 자리한 상점과 식당들을 보며 오랜만에 '번화가'에 온 기분이 들었다. 조용한 여행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오랜만에 사람들이 북적한 거리를 걷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스플리트 구시가지의 좁은 골목길이 미로 같았지만 큰 규모는 아니어서 금세 적응할 수 있었다. 숙소를 찾는 동안 구시가지에서 볼 수 있는 관광명소는 다 둘러봤기 때문에 도시를 조망할 수 있는 뷰포인트를 찾아 나섰다. 도시 뒤편에 자리한 낮은 산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이 있었는데, 꽤 긴 길이의 계단이었다. 한 계단 한 계단 천천히 밟아 나가다 보니 중턱쯤에 입구가 보였다. 그 길을 따라 오르고 또 올라, 이 길이 아닌가 싶을 무렵에 산 정상이 보였다. 


사방이 탁 트인 공간에서 한동안 바다와 그 바다를 마주하고 위치한 구도심을 바라보았다. 여행을 하며 느끼는 거지만, 이렇게 멀리서 무언가를 바라볼 때가 가장 마음이 편하고 즐겁다. 모든 소음에서 벗어나 내 숨소리가 크게 들릴만큼 고요한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 한 동안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며 숨을 고르다가 비가 쏟아질 것 같아 급히 숙소로 돌아왔다.

스플리트에 도착한 이후로 제대로 먹지 않고 계속 걸어 다녔더니 심하게 허기졌다. 그동안 대충 끼니를 때우는 식으로 식사를 했는데 오늘은 뭔가 맛있는 걸 먹고 싶은 마음에 맛집을 검색해 찾아갔다. 생선과 새우튀김요리에 레몬맥주(라들러)를 곁들여 먹었다. 오랜만에 포만감이 느껴지는 아주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식사를 하는 동안 해가 지고 도시에 어둠이 내렸다. 도시 곳곳 조명이 켜지며 스플리트의 밤거리를 비췄다. 바다를 마주 보고 있는 광장을 걸으니 선선한 날씨를 즐기기 위해 산책을 하거나, 벤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거나, 광장에 위치한 식당 테라스에 앉아 저녁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NGO단체에서 모금을 위해 영상을 상영하고 있었다. 영상에서는 길거리를 배회하며 길에서 먹고 자는 아이들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아이들의 부모는 알코올 중독 또는 아이를 양육할 능력이 되지 않아 길에 아이들을 버렸고, 그렇게 버려진 아이들은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하고 배고픔과 추위, 위생적이지 않은 환경 속에 방치되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아이들을 구조하여 교육을 시키고 제대로 된 식사를 제공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아이들을 위해 도움의 손길을 줄 것을 단체는 호소하고 있었다. 


길을 걷다 잠깐 영상을 본다는 것이 영상이 끝날 때까지 자리에 앉아있었다. 희망이 없을 것 같은 삶에 도움의 손길이 닿아 한 사람의 인생이 변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늘 가슴이 벅차고 울컥 감정이 솟아오르는 일이다. 나는 늘 그런 일을 꿈꿔왔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을. 그러나 그 신념과 마음을 어떠한 고난과 역경이 와도 견뎌내며 지켜내리란 참 힘든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이 힘든 이유는 내가 그들의 삶에 진정으로 함께하겠다는 결심이 온전하게 서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안다. 그래서 항상 고민이다. 난 내가 선택한 일을 계속해나갈 수 있는가.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스플리트의 밤거리를 유유 자작 걷던 나에게 직업에 대한 고민을 안겨 준 그 영상을 보고 마음이 다시 무거워졌다. 무거운 마음을 안고 걷다 보니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들렸고,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빈자리를 찾아 한 밤에 연주되는 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달랬다. 모두들 얼굴에 미소가 만연했고 신나는 음악에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췄다. 춤을 추는 사람들 덕분에 모두가 즐거워졌고, 연주자도 한껏 흥이 올라 더욱 즐겁게 음악을 연주했다. 나는 낯선 나라에 있는 이방인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이 곳에 주민이 된 듯 따뜻함이 느껴졌다. 고조되는 음악과 더불어 커져가는 박수와 환호소리, 춤을 추는 사람들의 몸짓이 한 여름밤의 축제를 연상시켰다. 


그래, 인생에 대한 고민일랑 우선은 털어버리고 우선은 흥겨움에 취해보자. 

선선한 날씨와 시원한 맥주, 고대 광장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소리와 사람들, 이 꿈만 같은 시간을 걱정과 불안으로 채우기에는 너무 아까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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