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초, 캔맥주, 옥탑방의 임팔'라' (1)
- 라에 대하여
00.
잘 헤어지기.
쉽고도 어렵고 또 한없이 쉽다. 물론 세상엔 좋은 이별은 없다. 이별이 좋은 사람도, 좋아서 이별하는 사람도. 그러나 잘 헤어졌다는 것은 마음이다. 온 마음을 다하여 결단을 내렸다는 것으로 ‘참 잘 했다. 수고했어.’ 건네본다.
그리고 잘 지내, 짧은 말로 내 안의 그 아이에게 삼가 명복을 빈다.
01.
그러니까 이것은 라에 대한 이야기다. 더 이상 우리가 아닌 우리는, 동갑내기 친구였다. 정말 오며가며 만났지. 별로 가까운 부서도 아닌데 일로 만나 일얘기는 나누지 않는 친구가 되었다. 얼마 후 라가 내가 사는 동네로 이사 왔고 콘초에 캔맥주를 마시며 함께 중랑천을 산책했다.
구정이 되기 며칠 전,
학교에서 보자던 선배의 장례식을 다녀온 지 이틀 째 되던 날이었다.
_ 원래 공원에서는 술을 마시면 안 돼.
_ 그래? 처음 듣는 소리네.
_ 뭐, 알 길이 없으니 잡혀가는 사람은 없지.
_ 알 리가 없으니.
라가 내가 산 콘초를 하나 더 집어 먹었다.
_ 아깐 과자 안 먹는다며. 내 거 뺐어먹으려고?
_ 이렇게 먹으니까 맛있네.
_ 나도 줘.
라가 콘초를 줄 듯 말 듯 장난을 쳤다. 전혀 로맨틱하지도, 설레지도 않은 분위기였다. 정말로 내가 유일하게 먹는 초코과자를 그가 다 먹을까봐 조바심이 들었을 뿐이었다.
_ 새 집은 어때?
_ 들렀다 갈래?
_ 나 업어주면.
나는 라의 등에 업혀 처음보는 골목에 들어섰다. 다세대 주택의 옥탑이었다. 거기서 자기가 다니는 회사가 보인다고 했다. 그게 이곳으로 결정한 이유라고. "일을 사랑하는 구나."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너는 끝까지 회사원으로 남을 거야?" 같은 소리를 했다. 여기에 네 반응은 떠오르지 않는다.
구정을 앞두고서 영영 이 세계를 떠나버린 선배. 그런 선배의 유언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치러린 장례를 겪고서 마음을 가누기가 힘겨웠던 때였다. 누군가의 기분이나 반응 같은 건 고려하기 어려울 정도로. 선배의 공연을 보고 고향 내려가는 버스표 시간에 맞춰 부랴부랴 나왔을 때 선배는 나에게 “우리 다음에 꼭 만나요. 인사해요.”라고 했다. 그게 마지막 대화였다. 공연 날 GV까지 마치고서 선배와 나눈 장문의 카톡이 여전히 그대로다. 다만 선배의 이름은 이제 (알수없음)이 되었을 뿐. 그래 정말로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친구라도 잘 모르는 남자의 집에 준비없이 들어선 건 우리 꼭 만나, 라는 이루지 못할 말을 잊기 위해서였다. 아니 술김에, 라고 하면 모든 것이 간단해질까.
_ 혹시 처음이야?
내가 라를 돌아보며 말했다.
_ 응.
한 번의 잠자리 이후 나는 라와는 더 이상 친구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20대 후반의 성인이 정말로 이렇게 첫 경험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이번엔 라가 나를 돌아보았다.
_ 우리 사귈래?
사랑에 빠져버릴 지도 모르는 눈이었다. 내가 아니라 너가.
그냥 그날 부로 안 보면 될 텐데 괜히 다신 연락하지 말자고 얘기했다. 나는 이런 류의 관계를 알고 있다.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충동적으로 어느 하루의 허기를 채우기 위한 행위로 맺어져버린 관계. 그리고 나는 그런 관계로부터 충분히 벗어난 상태였었다. 도망치듯 누군가를 껴안고 잠드는 일 따위는 없어야 했다.
02.
집을 나서는 순간에도 바래다주겠다는 걸 거부하고 굳이 택시를 타다. 연신 연락하지 않겠다고 했다.
_ 연락을 한다면 6월은 되서야 할게.
기다리지 말란 뜻이었는데 휴대폰 캘린더를 켜서 6월을 들어가더니 6월 언제? 하고 묻더라.
순진한 건지 능청스럽게 구는 건지. 살짝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6월 중순 넘어서. 대충 대답했다.
그 친구가 싫어서는 아니었다. 그 날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몸정이든 색정이든 정말 정이든 뭐가 됐든 나는 어디에 마음 붙이기엔 너무 지친 상태였다. 또한, 그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가끔 나누는, 서로를 잘 모르는, 사랑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동정남 20대 후반 동갑내기 아이와는 정이 들면 안 되고 연애는 더더 안 되며 사랑은 절대 하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그런 게 어딨냐고? 여기있다. 왜냐고? 더 이별하고 싶지 않으니까. 좋아하게 될 일 없을 거란 생각에 덥석 만나다 정이 들고 사랑해버려 큰 코 다친 경험이 있기에 더욱 그렇다. 나를 위해서, 너를 위해서.
나는 준비가 안 된 사람이다. 아직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래서 모든 종류의 들어옴을 거부한다. 문을 사이에 두고 얘기하는 건 좋다. 신발장 앞에 서서 이야기하는 것도. 그러나 신을 벗고 중문을 건너오면 안 된다. 아니 들일 수가 없다.
정말로 그랬는데.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