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초, 캔맥주, 옥탑방의 임팔'라' (2)

- 라에 대하여

by 이 별



03.


가벼운 마음인 줄 알았다. 우리가 뭐 흔히 말하는 썸을 타던 사이도 아니었으며 내가 아주 띄엄띄엄 연락을 받아줬고 농담만 주고받던 사이에 술을 마신 거니까.

그래서 이 친구가 나에게 사귀자고 했을 때 웃음이 났다.


_ 뭘 사귀긴 사귀냐. 그냥 또 하고 싶다고 해. 귀엽다 귀여워.


그러고 웃었다.


_ 그건 괜찮아?


그 친구의 대답에 더욱 그랬다.


_ 너 뭐 볼 게 있다고?


난 또 웃어버렸다. 웃어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내 바람과 달리 생각보다 그 애는 진심이었다. 사귀지 않아도 관계할 수 있지만 볼 수만 있다면 더이상 관계하지 않아도 된다고. 설령 그 말의 깊이가 얕았다하더라도 적어도 정말로 진심이었던 거다. 불현듯 S 생각이 나버렸다. 금방이라도 사랑에 빠질 것 같은 눈으로 한참 나를 바라보던 어리숙한 인간.


하루걸러 연락이 왔다.


_ 어제 잘 들어갔어?


답을 할까 이대로 끝낼까 고민하다가 답장했다. 응. 그 애는 빠르게 확인하더니 화났어? 물었다.


_ 지금 기분 좋아.


내가 대답했다. 숙원사업 같았던 머리 삭발을 하고 온 터라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그리고 계속 그 날 사랑에 빠질 것 같았던 그 눈이 계속 생각이 났다. 21년 음력 새날이 되기 며칠 전, 웃풍이 살짝 새던 옥탑방에서 보았던.


_ 방어 먹으러 나올래?

_ 방어 철 지나고 있는데 무슨.

_ 아 그건 그렇네.

_ 그리고 너 안 본다니까.

_ 난 보고 싶은데.

_ 나 머리도 밀어서 너 놀래.

_ 사진 보내줄 수 있어?

_ 아니 너한테 줄 사진은 없어.

_ 서운하게 말하네.

_ 서운할 일이 뭐 있어.

_ 피곤하지 않았어?

_ 엄청 피곤했지.


잠시 망설이다가,


_ 그래도 좋았어.


보냈다.


_ 응?

_ 너랑 한 거 좋았다고.

_ 와 그건 진짜 의외다.


그러고서 라는 웃었을까. 그렇게 몇 마디 말이 더 오갔다. 그날 일에 대해 나오면 라는 자꾸 말을 얼버무렸다.


_ 이런 얘기 쑥스러운 거야 혹시?

_ 응...


찌질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귀여운 대답이었다.


_ 너 나 좋아하니?

_ 응.

_ 날 얼마나 봤다고?

_ 사람 좋은데 이유 있나.


스물일곱은 그동안 한 인간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서서히 드러나게 되는 나이다. 조건을 따진다기보다는 적어도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았을 건실한 인간을 만나고 싶었다. 적어도 내가 살아온 만큼은. 소개를 받아도, 동아리 같은 곳에서 자연스레 친밀해져 진지한 관계로 발전하게 되도 그런 식이었다. 조금은 영리해진 것이다.


그러다 스물일곱에 들어서 동갑내기와 이런 식의 대화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몇 번 사적으로 만나 얼떨결에 하룻밤을 보내고서 누가 누굴 좋아하네 마네 하는 것. 잠깐 전화 통화를 했다. 의외의, 의외의, 의외의 행동을 내가 자꾸만 했다. 하지 않겠다 말하면 하지 않던 사람이 계속 스스로의 선언을 깨고 있었다. 그래도 우세스럽지 않을 것 같았다. 좋게 말하면 재미였고 나쁘게 말하면 놀이였다. 아등바등 현실에 맞춰 어른 옷을 입고 사는 게 답답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모든 걸 너무 쉽고 만만하게 여겼던 것 같기도 해.


_ 우리집에 올래?


내가 먼저 공을 던졌다.


_ 언제?


라가 바로 받았다.


_ 내일.

_ 안 본다며...


라가 머뭇거렸다. 공을 받아 바로 1루로 뛰어가지 않고 머뭇머뭇. 그 때도 S의 목소리가 잠깐 스쳤다.

'봐도 돼?' 묻던.


_ 확인하고 싶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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