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초, 캔맥주, 옥탑방의 임팔'라' (3)
- 라에 대하여
04.
이 날의 키워드는 삭발. 그리고 연어.
라는 내가 6mm로 삭발한 모습을 본 두 번 째 사람이다.
1번은 삭발과정을 영상으로 남겨준 나의 친구 윤.
라는 삭발한 여자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며 자기가 입대하던 때보다도 짧은 머리라며 만져보고 싶어했다. 까슬까슬한 고슴도치 같다면서 손으로 연신 쓸어보며 감탄을 뱉었다. 예쁘다 아니다 같은 소리는 하지 않았다.
나는 거기에 "머리 감기 엄청 편해" 그랬고, 라는 양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입술 사이로 치아가 몇 개 드러났다. 눈은 여전히 내 삭발 머리에 고정한 채로. 며칠 전 술 기운에 일까지 치른 남잔데 이 앞에서 삭발 머리를 내놓고 있는 게 딱히 아무렇지 않다는 게 스스로 좀 신선한 경험이었다. 내가 이 사회에서 살아오면서 '삭발한 여자'에게 따라붙는 수상한 눈초리에 익숙해진 인간이라서 지레 짐작하거나 우려했던 부분도 있었겠지만 라는 나에게 신선함을 많이 불어넣은 남자였다. 그냥 무엇이든지 다 보여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신뢰를 기반으로 한 관계가 아닌데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무엇이든 터놓을 수 있고 비웃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던 건 처음이었다.
지금의 시점에서 미루어봤을 때, 라가 정말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나는 라를 끝까지 몰랐고, 그 어떤 사람에게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다만 내가 아는 것은 나는 라에게 아무 것도 바라는 것 없이 무장해제 되었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그 애정이 다시 회수되고서도 내가 나를 참 많이 다독였어야 했음이다.
어쨌든 우리는 생연어를 먹었다.
기름장과 생와사비를 곁들여 먹는데 이야기하다보니 먹는 취향이 참 비슷했다.
식탐도 있어보였다. 그 점은 나와 달랐다. 식탐이 있었지만 그렇게 많이 먹지는 않아서 2만원이 좀 넘었던 연어 사시미가 둘이 먹고도 몇 점 남아 더운 방 공기에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가 오갔다. 주로 휘발성 있는 유머들이었을 것이다. 말장난 같은 것 말이다.
그러다 대뜸 라가 집 근처 역까지 얼마나 걸리냐고 물었다.
_집에 가려고?
_아니, 그... 화장실 가고 싶어서.
라는 멋쩍게 시선을 피했다. 민망해서 시선을 한곳에 두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_아니, 뭐 그냥... 내가 언제 간다고 했냐. 갔다가 다시 오면 되지.
나는 라가 앉은 의자 뒤 편으로 난 화장실 문을 가리켰다. 라는 더 얼버무렸다. 부끄럽구나? 내가 말을 던지며 웃자 라는 에이씨...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끝내 화장실을 가지 앉으려 애썼다.
_그럼 잠깐 밖에서 내가 기다려 줄게.
그러자 라는 표정이 밝아지더니 "그럼 좀 부탁할게." 하고서 화장실을 썼다. 처음 온 여자의 집에서 연어를 먹고고 배가 아프다며 역에 다녀오겠다는 남자. 그 여자가 결국 잠깐 자리를 비워줘야 화장실을 다녀온다는 남자. 나는 그런 것들이 거슬리지가 않았다. 나를 머리 아프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게 얼굴에 드러났으니까.라는 그 날 이후로도 몇 번 배가 아플 때마다 "아- 역에 좀 다녀와야 되겠는데?"했다. 말은 그러면서도 화장실을 썼다. 대신 헤비메탈 노래를 커다랗게 틀어놓고서, 내 귀에 이어폰을 꽂아놓고서. 그런 행동들이 귀엽게 느껴졌다.
05.
연어를 먹고, 화장실 가는 걸로 또 웃고, 한참을 놀리고, 잠을 잤다. 잠을 잤는데 잠에 들지는 못 했다. 잠이 들기 어려웠다. 남자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내가 낯선 사람과 좀처럼 나란히 누워 잠들 수 없는 인간이라서 그랬다.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나 드러나는 것은 좀 두려웠던가. 내게는 잠 자는 모습을 타인에게 보이는 것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있다. 자꾸 뒤척거리자 라가 잠에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잠이 안 와?" 나는 작고 조금 무심한 목소리로 "좀 그렇네." 답했다. "내가 옆에 있어서?" 다시금 물었고 나는 조금 더 무심한 목소리로 "너 아니어도 그랬을 거야." 답했다. 한참 말이 없다가, "집에 갈까?" 라가 다시 물음을 꺼냈고 나는 거기에 바로 대답하진 못했으나 "응." 짧게 답했다. 새벽 4시였다.
라는 벗어둔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나도 옷을 대충 껴입고 배웅했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자고 가."라고 말하자, 라는 "아냐. 너 못 자면 나도 못 자. 출근하기도 집이 편하고."라고 말했다. "가고 싶어서 가는 거야?"라는 말에는 "반반?"하고 웃어보였다. 그날 미안한 마음이 무색하게도 나는 아주 깊은 잠을 잤다.
라를 만난 모든 순간을 기록할 수는 없겠지만 이게 이 인연의 첫 시작점이다. 라와 나에게 인연의 실이 얼기설기 꼬여 버렸던 그 시작점.
라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 지 같은 건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당시에 나는 너무 복잡한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만 질문했다.
저 아이가 너에게 어떤 의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