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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현승 Oct 29. 2021

바람 부는 날 / 김종해_(딸과 함께)

가족과 함께 시를 낭송합니다 01 _ 딸의 목소리

바람 부는 날  / 김종해


사랑하지 않는 일보다
사랑하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나는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날마다 가고 또 갑니다.
어둠뿐인 외줄기 지하통로로
손전등을 비추며 나는 당신에게로 갑니다.
 
밀감보다 더 작은 불빛 하나
갖고서 당신을 향해 갑니다.


가서는 오지 않아도 좋을
일방통행의 외길, 당신을
향해서만 가고 있는 지하철을 타고


아무도 내리지 않는 숨은 역으로
작은 불빛 비추며 나는 갑니다.
 
가랑잎이라도 떨어져서
마음마저 더욱 여린 날,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그래서 바람이 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딸과 함께 낭송을 했습니다. 시를 낭송하고서 잠시 시를 보면서 이야기를 나눴네요. 시 구절을 보면서 "왜?" 라는 질문을 하면서 서로의 생각과 느낌을 이야기했습니다. 갑자기 정답이 있었던 저의 중고등 국어 시 수업 시간이 떠올랐습니다. 지금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그 시절 시를 암송하지 못해서 매를 맞았습니다. 시 수업 시간은 밑줄 쫙 긋고 그 아래에 빼곡히 선생님이 불러주는 뜻을 쓰느라 바빴습니다. 시를 배웠는데 시와 멀어진 시간들이었습니다. 시와의 만남은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렇게 시와 멀어졌습니다.


시는 그냥 낭송하면 그만이지 않을까 했습니다. 시를 노래하면서 마음에 스치는 무엇이 있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해요. 잘 모르는 부분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해요. 딸과 함께 시를 놓고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점을 고려했습니다. 멋진 말들을 찾기 말기. 딸에게 이건 이런 뜻이야 라고 힘주어 말하지 않기. 그저 딸이 이야기하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기로! 물론 제 느낌과 생각도 딸에게 이야기를 했죠.


아빠 : 은결아, 바람 부는 날을 읽었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어?

딸 : 짝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 조금 슬펐어.

아빠 : 아, 짝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 슬펐다는 말이지?

딸 : 어떤 단어 단어에서 살짝 짝사랑 분위기가 느껴졌어.

아빠 : 이 시를 소리 내어 읽었을 때 어떤 마음이 들었어?

딸 : 특별한 건 없었어. 그냥 천천히 읽으려고 했을 뿐이야.

아빠 : 시를 빠르게 읽지 않고, 천천히 잘 낭송했어.


아빠 : 사랑하지 않는 일보다 사랑하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이런 날이 있을까? 이런 날은 어떤 날일까?

딸 : 이런 날은 그냥 죽고 싶은 날 아니야?

아빠 : 왜 죽고 싶은 날인 것 같아?

딸 :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기 싫은 거잖아.

아빠 : 아, 아무것도 하기 싫다?

딸 : 이 사람은 누구를 사랑하는 게 어려운 거지. 뭔가 마음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아빠 : 근데 사랑하는 일이 힘들다고 하면서 왜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 간다고 했을까?

딸 : 비유한 것 아니야?

아빠 : 그렇지 자신의 힘든 마음을 비유한 것이지. 당신에게 간다고 한 것은, 그 당신과 가까워지겠다는 뜻인데 힘들다고 하면서 왜 계속 그 사람에게 가까이 가는 걸까?

딸 : 마음이 힘들면서도 누군가에게 계속 가까워지고 싶은 게 있어. 짝사랑! 짝사랑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날마다 가고 또 가는 거잖아.

아빠 : 당연하지. 너도 짝사랑을 해 봤구나. 아빠도 그 느낌이 뭔지 알아. 맞아. 날마다 가고 또 가고 싶은 게 짝사랑 같아.

딸 : 어둠뿐인 외줄기 지하통로로 손전등을 비추며 나는 당신에게로 간다고 했잖아. 왜 손전등을 비추는 건지 알아? 짝사랑은 그렇잖아. 이미 내 마음은 열려 있는데, 상대는 그렇지 않은 거잖아. 손전등은 비추는 건, 내 마음의 빛을 보내고 싶은 거야. 상대가 나를 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이고, 내 마음을 계속 보여 주고 싶은 거지. 그러니까 계속 가고 또 가는 거고. 작은 불빛이라도 이 사람에게는 괜찮아. 사랑하는 사람에게 불빛을 들고 가는 게 중요한 거지. 불빛은 좋아하는 마음이야.

아빠 : 일방통행의 외길도 짝사랑 같아.

딸 : 딱 봐도. 이렇게 보고 저렇게 봐도 일방통행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 저쪽에서도 오면 좋겠지만.


아빠 : 그런데 그 지하철은 오직 당신에게로만 향한다네.

딸 : 그러니까 짝사랑이지.

아빠 : 가랑잎이라도 떨어져서 마음마저 더욱 여린 날이란 어떤 날일까?

딸 : 가긴 가는데 살짝 지친 거지.

아빠 : 아, 지친 거...

딸 : 이게 언제쯤 끝이 날까? 정말 끝이 있을까? 걔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 날이 올까 하는 거...

아빠 : 음, 이해가 돼.

딸 : 얘한테서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난 애를 좋아하는 게 맞는 건가 하는 질문이 생기거든.


아빠 : 좋아 좋아.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시 맨 처음에 나온 것 같은데 그것과 똑같은가?

딸 : 이건 아까와 좀 달라.

아빠 : 맞아. 갑자기 바뀌었어. 왜 이렇게 됐을까?

딸 : 아까 살짝 지치기도 했잖아. 다시 좋아하게 된 거 같아.

아빠 : 그래서 바람 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간대. 왜 바람 부는 날에 간다고 했을까?

딸 : 모르지. 아! 바람이 부는 날은 살짝 썰렁할 수 있잖아. 내 마음이 살짝 식을 때 그에게로 가고 싶은 거지.

아빠 : 오! 이런 생각은 못 해 봤어. 혹시 은결이에겐 이렇게 지하철을 타고 가고 싶은 당신이 있나?

딸 : 당연히 있지.

아빠 : 오빠들?

딸 : 우리 NCT 오빠들 너무 좋지. 지하철이 아니라 비행기 타고 가고 싶지.

아빠 : 처음에 사랑하지 않는 일보다 사랑하는 일이 괴롭다고 했다가 반대로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는 않는 일이 괴로운 날로 바뀐 얘기를 조금밖에 못 한 것 같아. 아빠는 이 부분이 잘 이해가 안 가서... 왜 이렇게 갑자기 바뀌었는지...

딸 : 갑자기 바뀐 게 아니야. 그러니까 그 사이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어. 나는 걔를 좋아하는데 걔는 언제 마음이 변할지 모르고. 이게 맞는 건가 의심도 들겠고. 얘가 자기를 좋아할 거라고 믿고 싶기도 하고. 처음엔 짝사랑이 힘든 거였어. 그러다가 이젠 그것을 포기하는 게 더 힘들게 되었지. 이 사람은 자신의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거야. 그래서 계속 가는 거고.


아빠 : 맞아. 자신의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 같아. 그런데 왜 여러 가지 이동 수단이 있는데 지하철을 타고 간다고 했을까? 아까 은결이처럼 비행기 타고 가면 더 빠른데 말이야.

딸 : 비행기는 서지 않고 한 번에 가잖아. 지하철은 그게 살짝살짝 멈추잖아. 사랑도 그런 거라는 거야. 멈추고 가고 또 멈추고 가는 걸 반복하는 거. 또 지하철은 멈추면 사람이 타잖아. 사람들이 많이 탈 때도 있고 적게 탈 때도 있고. 사람들이 많이 탈 때는 사랑하는 마음이 왈칵 들어올 때야. 적게 탈 때는 이게 진짜 사랑인지 의심하거나 식을 때고.

아빠 : 그래 맞아. 멈추기도 하고 다시 출발하기도 하고... 이것을 반복하는 게 지하철이지.

딸 : 근데 아빠 종착지에 도착하면 사람들이 다 내리잖아. 결국 그 결말을 알면서 간다는 뜻도 될까?

아빠 : 아, 그게 짝사랑의 진짜 아픔일 수도 있지. 사랑하는 일이 고통스럽기도 하고, 사랑하지 않는 일이 괴롭기도 하고... 그래도 바람 부는 날 누군가에게 가는 자체가 그 사람에게 행복한 일이라면 가야겠지?

딸 : 내가 그래. 내가 NCT 오빠들을 좋아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건 없어도 그냥 좋아하게 되는 그런 마음과 비슷할 수 있지.

 


오래간만에 시를 가지고 딸과 이야기를 했네요. 이런 해석이 자습서에 있을까요? 중1~고3까지, 심지어 대학교 때도 이런 대화는 하지 못했네요. 시어 아래 밑줄 그어진 해석을 외우기에 바빴죠. 시를 배울수록 시가 두렵고 시와 점점 멀어져 나기만 했습니다. 시가 다시 제게 진짜 자기 모습으로 다가온 때는 제가 그냥 시를 소리 내어 읽거나 암송했을 때였습니다. 따로 해석하려고 애쓰지 않고 마음으로 느껴보려고 했을 때였습니다. 다른 분들의 해석을 정답처럼 여기지 않을 때였습니다. 시와 내가 일대일로 만나 느끼고 생각한 것을 사람들과 편하게 나눌 때 시를 또 만나고 싶어지더라고요. 여기까지 오는 데 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딸과 이야기를 나눌 때 이런 마음으로 시 대화를 하니까 대화를 하면 할수록 '오!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네.' 하며 참신한 의견과 재밌는 느낌이 톡톡 튀어나오더라고요. 앞으로 종종 딸과 함께 하는 시 낭송과 대화가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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