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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스킷 Oct 28. 2022

심야 복싱 1

맞고 나니까 달라졌어요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웠다. 삶이 반복되어 지루해질 때쯤이었다. 팍팍한 하루 중 잠깐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유튜브에 파이트 클럽과 좀비 트립이라는 프로그램이 새로 나와서 끝까지 봤다. 프로가 아닌 준비생 혹은 일반인이 참가자로 나오는 상금을 향한 도전이었다. 왠지 더 가까운 사람처럼 느꼈다. 경연 프로그램에서 심사위원을 앞에 두고 노래하는 참가자를 보는 기분이었다. 하고 싶나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내 고개 저었다. 그저 자극적인 게 하나 필요했다. 저렇게 치고받으면 반드시 어디 하나 날려먹는다. 생명을 깎아먹는 것이다. 다시 잠에 들었다.


 어느 날 하기로 했다. 프란시스 은가누와 디온테이 와일더가 뒤에서 주먹을 겨누며 협박한 것이 아니다. 비합리성에 맞서 땀 흘리는 사람들을 외면하기 어려웠다. 평균보다 10cm 정도 큰 키와 두껍지 않은 팔다리 때문에 괜찮지 않을까 싶은 발칙한 생각도 들었다. 계속해서 원했지만 미뤄온 걸 수도 있다. 매일 간단히 쓰던 헬스 일지를 몇 번이고 봤다. 부족한 체력 그리고 오만함을 등에 지고 체육관에 등록했다. 체육관에서 구매할 글러브와 핸드랩의 색상을 골랐다. 하얀 핸드랩과 빨간 샌드백용 백글러브. 첫 글러브와 붕대였다.


 어림없이 줄넘기 먼저 시작했다. 숨은 차지 않고 종아리에 고통만 가득 찼다. 뛸 때마다 알이 심하게 배겨 걷기도 힘들었다. 정강이도 찌릿한 게 처음 겪는 통증이었다. 온몸에 들어간 힘부터 빼려고 했다. 어느 순간 쉬는 시간 없이 3라운드를 뛰고 있었다. 원투, 훅, 어퍼와 몇 가지 콤비네이션을 반복하고 나니 이것의 응용이다라는 이야기만 듣고 더 배울 자세가 없다고 했다. 맞는 말이긴 했다. 어떻게 했는지도 모를 멍청한 움직임으로 혼자 연습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 잽 하나, 스트레이트 하나를 프로가 인정한 건 훈련과 조언을 받으며 몇 개월이나 지난 뒤였다. 처음엔 무슨 수를 써도 주먹이 가볍지 않았다. 다리, 엉덩이, 허리, 등, 어깨, 팔 어딘가 힘이 들어가서 하나로 연결되지 않았다. 따로 놀았다. 채찍처럼 가벼우면서 순식간에 쾅. 움직임만 바꿔가며 반복했다. 녹슨 기계에 기름칠하는 게 이럴까. 새로운 지겨움이 피어나던 와중에 어색하게 웃으며 프로 선수의 스파링 제의가 왔다.



 빨간 샌드백용 백글러브 보다 더 무거운 스파링용 글러브를 착용했다. 매스 혹은 메도우라는 방식으로 가볍게 툭툭 쳤다. 아프지 않으니 산책 나간 개처럼 움직였다. 머리와 팔과 몸을 반복적으로 흔들고 이따금씩 박자를 바꿨다. 손을 내기도 하고 내려다 말기도 했다. 기본도 안된 채로 어디서 본걸 하려고 시도했다. 몸이 한결 가벼워지고 할 만했다. 끝나고 헬스장 가는 걸음이 가벼웠다. 집으로 나비처럼 날아가 벌처럼 빠르게 잠들었다. 몇 주뒤 그가 평범한 스파링을 제안했다. 시작하기 전 평소보다 빠르게 샌드백을 두들겼다. 호흡이 좀 더 가빠졌다. 종이 울리자 앞 손을 툭툭 던졌다. 그런데 80kg인 나보다 20kg 더 나가는 헤비급 선수의 주먹으로 툭툭 치는 순간 앞이 안보였다. 훅을 맞는 순간 망치로 때려 맞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허우적댔다. 침착하고 싶었다. 팔을 들어 몸과 턱을 막았다. 링은 4~5걸음 정도밖에 안 되어 비좁고 발은 무거웠다. 스텝도 없어서 도망칠 수 없었다. 머리를 막으면 몸통, 몸통을 막으면 머리 한 박자씩 늦었다. 왼손잡이가 유리하다지만 막 시작한 나에겐 의미 없었다. 우악스럽게 점프하며 던지는 스트레이트에 매번 가드는 뚫리고 그렇다고 뒤로 빠질 수도 없었다. 어설픈 움직임으로 사이드로 돌려고 하면 가는 대로 주먹이 날아왔다. 가까이 붙는 순간 나는 숏 훅과 어퍼 등 근접전을 위한 최신 샌드백으로 탈바꿈했다. 얻어걸린 스트레이트를 빼면 내 타격은 거의 없었다. 마침내 3라운드 중간쯤 스파링을 포기했다. 세면대에서 피를 뱉고 거울로 얼굴을 응시했다. 검붉은 피가 맺힌 눈꺼풀, 마우스피스가 없어서 치아에 찍힌 입가와 헤드기어를 벗으며 헝클어진 머리카락. 처음 맞이한 광경에 실소가 터지다가 다시 표정이 굳었다. 스파링을 끝낸 뒤 헬스장을 찾지 않았다. 말없이 집에 돌아와 부어 터지고 굳은 표정으로 잠들었다. 아이라인을 그린 것처럼 눈 주위가 까맸다. 그날 이후 확실히 알았다. 내가 할 줄 아는 게 거의 없다는 것을. 그리고 다음날 어김없이 일을 마친 뒤 복싱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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