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춘 세상에서 균형 잡기

버팀의 종말 앞에서

by 배시현


입사 몇 년 후 코로나19가 창궐했다. 온 세상을 멈추게 한 그 바이러스는 당연히 내 삶에도 균열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몇 달은 쉬어야 했고, 몇 달은 다른 지점으로, 그러다 본사와 지점을 오가며 내 정체성까지 흔들리는 그야말로 땜빵 인생이 시작되고 있었다.


코로나는 우리를 묶어두기도 했지만 묶인 우리를 움직이게도 했다. 대대적인 부서 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는 인원의 불균형 속에 어쩔 수 없는 회사의 선택이었지만, 그 변화는 이례적인 상황만큼 파격적이어서 직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부서 이동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인 것은 그 시절 많은 회사들의 권고사직이 불가피한 상황 속에서 그래도 우리는 부서 이동과 휴직 제도만으로도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이다.


회사의 인원 불균형은 이런 것이었다. 본사 인원은 부족한데 충원할 수는 없고, 지점 상황은 갈수록 안 좋아져 대기 인원이 증가하는 추세였다. 인원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회사는 부족한 자리에 남는 인원을 배치하거나, 한 명의 직원으로 본사와 지점 양쪽을 커버하기도 했다. 그 한 명의 직원은 내가 되었고, 본사와 지점을 오가며 일손이 부족한 부분을 메꾸는 용접공 역할을 부여받게 되었다.


회사는 나에게 두 곳 다 지원의 역할이니 적당히 일하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성격의 두 곳에서 번갈아 근무한다는 것은 말이 둘 다 지원이지, 두 곳의 업무 대부분을 숙지하지 못하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강도는 세지 않지만 두 개의 모듈로 남들보다 두 배의 일을 하는 셈이었다.


나는 양쪽의 눈치를 보며 나름 균형 잡기에 집중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나의 노력은 회사의 눈높이에 닿지 않았고, 당연히 개인의 퍼포먼스를 높이 봐주지 않았다. 게다가 한 곳에서 오롯이 근무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날 대변해 줄 뚜렷한 상사도 없어 시간은 가는데 나는 계속 승진에서 밀려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소속감이란 단어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 감각의 부재에서 오는 소외감이 어찌나 사람을 서럽게 만드는지, 혼자만의 결핍으로 오해했을지는 모르겠으나 양쪽에 한 발씩 걸치고 있던 나는, 회사가 미리 언질 해 주었듯이 ‘적당히 일하면 되는’것처럼 ‘적당히 대해주면’ 그만인 존재였다. 누군가는 나에 대해 “하고 싶은 일만 하는 애”라고 했고, 그 프레임은 선이 얇은 인상과 결부해 ‘여우 같은 애’로 보이기도 했다. 또 누군가는 “아니야, 겪어보면 걔만큼 곰 같은 애도 없어”라고 대변하기도 했다지만, 어차피 각자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게 사람 아니겠나? 이 진리를 증명이라도 하듯, 내 노력과는 상관없이 그해 연도 KPI에 적힌 (이틀 같이 근무한) 상사의 코멘트는 서러움에 북받쳐 있던 나에게 억울함까지 알차게 더해주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 고백하자면 그때 집에 갑작스러운 빚이 생겼고, 내 명의로 처음으로 고금리 대출을 받아야 했다. 물론 줄어든 내 월급도 그대로 빚에 먹혀 버렸고.


회사도 집도 마음 편한 곳이 없었다.


그리고 검진 날이었다. 불시에 찾아온 불청객을 6개월에 한 번씩 추적하는 날이었다. 걱정하실까 봐 부모님께는 비밀로 하고 병원에 들렀다. 초음파를 보고 조직 검사를 하자는 말에 일부 조직을 떼어낸 검사를 진행했는데, 아무래도 위험할 수 있는 조직이 발견되어 용종 전체를 다 떼어내 다시 조직 검사를 해야 한다는 진단이었다. 수술 날짜를 잡으려 하니 도무지 무서워 부모님께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화를 걸어 엄마에게 상황을 말하는 순간, 버티고 버티던 울음이 큰 파도가 되어 나를 잠식시켜 버렸다.


회사도 집도 분명 잘 버텨왔는데 이젠 몸까지 아프다니. 몰아치는 불행에 나는 녹다운이 되어 도저히 일어날 수가,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어쩌면 울음과 함께 참고 있던 짐을 잠시나마 내려놓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