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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진 Jul 16. 2021

'사라 바트만'은 여전히 곁에 있다!

영리한 소수가 수세기 동안 시대의 삶을 독점해 어떻게 그렇게 편하게 살 수 있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던 때, 그리고 다수가 밤낮으로 일한 노동의 대가를 고스란히 남에게 빼앗기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던 때에는, 양쪽 다 그것을 자연의 질서라고 생각했으므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그런 세계가 유지될 수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편견과 습관을 진리로 받아들인다. 그런 진리는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 진리가 허무맹랑한 것임을 깨닫자마자 모든 것은 당장 끝나버린다. 그때 소수는 다수에게 불합리한 일을 시키기 위해 폭력을 쓴다.  <게르첸>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세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거짓 진리에 의해 휘둘러지는 무수한 폭력!

인간과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 무엇인가를 좀 더 가진'자들의 엄청난 횡포를 그럴듯하게 포장하기 위해 생긴 우월주의!! 그리고 그 가장 끝에 있었던 제국주의!


<사라 바트만>은 19세기 제국주의로 인한 인종차별의 대표적인 상징적인 여성이다.

'여성(女性)'이란 말을 그녀에게 붙이는 것조차 미안할 만큼 그녀는 평생 동물처럼 살았다. 그녀가 죽은 뒤 한동안도 그녀는 동물이었다.


스무 살의 나이에 가족과 함께 살던 고향을 강제로 떠나야 했고, 엉덩이와 성기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인종 전시'의 한 품목으로 전락했다. 5년 동안 이어진 전시 후 그녀는 처참하게 버려졌고 사창가를 떠돌다가 사망한다. 


하지만, 그녀는 죽어서도 사람이 될 수 없었다. 그녀의 시신은 당시 프랑스의 유명한 해부학자에게 양도됐다.

그녀의 시신은 '흑인은 신체의 특정부위(뇌, 성기)가 진화한 백인과 매우 다르며, 그 이유는 바로 성욕이 과잉되었기 때문이다.'라는 백인 우월주의 사고를 뒷받침하는 증거를 찾기 위해 무참히 해부됐다. 하지만 해부 결과는 발표되지 못했고 사라 바트만의 유해는 뇌와 성기가 병에 담긴 채로 186년 동안 프랑스 인류학 박물관에 소장 및 전시된다.


<출처 : 네이버 블로그 '커피 향기 아름다운 세상'>


1955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고인류학자 필립 토바이어스(Philip Tobias) 교수는 파리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사트만의 유해를 처음 봤다. 이후 그는 그녀의 유해를 돌려받기 위한 노력에 평생을 바쳤다. 넬슨 만델라 대통령 역시 총력을 다했지만 영국을 움직이긴 역부족이었다. 


그러던 중 2002년 5월 3일! 사라 바트만의 유해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뒤늦게라도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한 건, 외교력이 아닌 한 편의 시(詩) 한 수였다.

역시 글은 강하다. 아무것도 아닌 듯 하지만 사람을 스스로 움직이게 한다.


나 당신을 해방시키러 여기 왔나이다.
괴물이 되어버린 인간의 집요한 눈들로부터 제국주의의 마수를 가지고
암흑에서 사는 괴물. 당신의 육체를 갈가리 찢어내고 당신의 영혼을 사탄의
영혼이라 말하며, 자신을 궁극의 신이라 선언한 괴물로부터!

 -다이애나 퍼러스(Diana Furrus)  <나 당신을 고향에 모시러 여기 왔나이다>-

<사라 바트만>을 동물로 취급한 이들은 악마가 아닌 보통의 사람들이었다. 지금에 와서야 '어떻게 저런 일이 있을 수 있지?'라며 분개하고 가슴 아파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그녀의 벌거벗은 몸을 보고 유희했다. 그들의 우월주의는 의심조차 하지 않는 진리였으므로...


아마도 내가 19세기 영국으로 돌아간다면 나 또한 그녀를 보고 즐겼을 것이다. 당연히 죄책감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의 내가 전생의 나와 이어져 있다고 생각해보자. '사라 바트만을 보고 즐겼던 악마 같은 사람들'과 '유리장 안에 갇힌 채 농락당하고 있는 다른 인간' 중 어떤 인간이기를 바라는가? 선뜻 답하기가 쉽지 않다.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돌아온 사라 바트만의 유해를 맞이하며 이렇게 말했다. 

  "용서는 한다. 그러나 잊어버리지는 않겠다."라고...


그녀의 후손인 코이코이족이 아닌 우리들도 그녀를 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주변에, 우리가 웃고 즐기는 시간과 공간에도  <사라 바트만>의 피 끓는 아픔이 공존할 수 있다.


세상을 당연시 보면 안 된다. 진리를 의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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