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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진 Oct 06. 2024

2. 구포무장애숲길

   -서진아, 내일부터 우리 같이 걷자! 너랑 둥이, 그리고 나는 걷지 않으면 죽어.

 금요일 퇴근 전, 남편에게 카톡이 왔다.

  -걷지 않는다고 죽을 것 까지야. 열심히 숨쉬기 운동하고 있다니까!

  -아니야, 진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너도 너지만 우리 아들 둥이. 계속 집에만 틀여 박혀 있게 할 거야? 엄마인 네가 움직여야 둥이도 움직인다니까. 휠체어, 유모차도 갈 수 있다는 아주 쉬운 코스를 찾아놨으니까 내일은 무조건 나가자. 알겠지?

숨이 찰만큼(?) 걸어 올라가다 보면 만날 수 있는 무장애숲길 안내판

 '무장애 숲길?' 이름이 너무 직관적이고 무성의하다고 생각했다. 무장애? 장애가 없다, 난 이미 있는데?, 사려니나 하모니숲길처럼 이름만 들어도 요정이 살 것 같은 곳들을 두고 하필 이런 곳이라니. 

 블로그를 찾아보고 나서야 남편의 의도를 알게 됐다. 산 정상까지 나무데크가 잘 깔려있어 노약자와, 장애인도 쉽게 산을 오를 수 있는 곳이라고. 나는 '나무데크', '쉽게' 두 단어만 기억한 채 '알았어, 가보자'라고 답을 보냈다.


남편의 말대로 등산로 초입부터 데크가 잘 깔끔하게 잘 깔려있었다. 송진가루로 노랗게 된 부분은 있었지만 파손된 곳 없이 깨끗했다. 

나를 닮아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둥이도 앞장서서 제법 잘 걸었다. 

국군의 날 전후로 바뀐 계절 덕분에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무더위를 보낸 후 맞는 시원한 산바람. 

심호흡이 절로 쉬어졌다. 날아라 슈퍼보드(이거 알면 옛날사람?)에 나오는 사오정처럼 입을 크게 벌렸다. 몇 주간 날 괴롭히던 구내염이 싹 낳는 것 같았다.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음...... 조금 걷다 보니 내가 간과한 것이 생각났다. 

총길이 2km.

리에 대한 감각이 남달리 낮아서 무심코 지나쳤던 데크의 총길이. 블로그에 2km라고 적혀있었다는 게 걸을수록 생각났다. 길은 편했지만 오르막을 계속 오르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헉헉 거리며 이제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할 때, 첫 번째 전망대가 눈에 보였다. 

공식적으로(?) 쉴 수 있는 곳이었다. 

집을 나설 때 남편이 텀블러에 얼음을 넣어 정성스럽게 준비한 시원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니 탁 트인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 가을은 뭉게구름의 계절이다. 어쩜 이리도 파랗고 높은 하늘에 몽글몽글한 흰구름이 예쁘게 펼쳐져 있을까.

 

 닿을 듯 말 듯 닿지 않는 부부 바위에 대한 안내문을 보며 우리 부부는, '역시, 부부는 저렇게 떨어져 살짝 떨어져 지내야 된다니까.'라고 말했다. 

 아무리 좋은 사이라도 자신과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가깝게 지내면 탈이 나고야 만다. 

 다시 출발!

  "아빠, 이제 다 와가? 몇 걸음 남았어?"

  "1,100m 남았다면 우리 집에서 어디까지야?"

 점점 다리가 아파온다. 무더위가 물러가 잠시 잊었던 땀이 몽글몽글 솟아났다. 역시 반팔을 입고 오길 잘한 것 같다.

 


 내려오는 사람들이 우리 가족에게 '파이팅'을 외친다. 한 사람의 응원은 산자락을 타고 이어진다. 우리 가족을 보는 사람마다 파이팅을 외친다. 나이 든 남편, 살짝 절뚝거리는 아내, 천하장사 부럽지 않을 만큼 뚱뚱한 아들이 안쓰러워 보인건지, 산 사람들의 매너인지 모르지만 힘이 났다. 

  "900m 남았어, 이제 700m네. 둥아, 이제 우리 집에서 학교까지 가는 만큼만 더 가면 정상이야!"

 데크에 붙은 거리표시 스티커를 세가며 한발 한발 어렵게 옮기던 어느 순간. 정상이 눈앞에 보였다.


 산 중턱 휴게 전망대와는 차원이 다른 풍경이 눈앞에 쫙 펼쳐졌다. 퐁당 하고 뛰어내리면 아무리 무거운 중년의 아줌마라도 탈 수 있을 것처럼 폭신한 구름이 쫙 펼쳐진 아래, 졸졸 시원하게 흐르는 강물. 그리고 푸른 산. 예쁘다는 감정과 끝까지 올라왔다는 뿌듯함이 마구 몰려왔다.

  "오빠, 드디어 내가 2천 미터 산을 올랐어."

  "2천 미터는 무슨. 그러면 한라산보다 더 높은 건데? 말도 안 돼."

  "저 앞에 돌비석에 그렇게 적혀 있던데 같이 가서 볼까?"

 나는 의기양양하게 남편을 이끌고 표지석 앞으로 갔다.

  "푸하하, 봐봐! 210m잖아."

 이런...... 아까 내가 봤을 때는 분명히 '해발 2100m'였던 것 같은데. 잠깐 사이에 숫자'0'이 떨어져 나갔나 보다.


 "서진아, 있어봐! 이렇게 산책하다가 우리도 언젠가는 네 말대로 2천 m 산을 오를 수 있을 거야."

  

 헉헉 거리는 나와 둥이와는 달리  남편은 여전히 호기롭다. 밝은 에너지의 남편이 대책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어두운 동굴 속에 자꾸 숨으려고 하는 내겐 분명 필요한 사람이다. 감사한 사람.





 언제나 그렇듯, 내리막길은 올라가는 시간의 반도 들지 않았다. 절반의 힘도 들이지 않은 채 청명한 산바람을 맞으면 내려오는 길은 꿀 맛 그 자체였다. 인생도 이렇겠지, 중년이 지나면 오히려 쉽게 내려가지는 이 길이 아쉽게 느껴질 것이란 게 예상됐다. 나는 아직도 내 인생이라는 산을 오르고 있는 중이겠지?


 무사히 등산(?)을 마친 우리 가족은 근처 구포시장으로 향했다. 부산에 살기 때문에 '구포시장'이라는 명칭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온 것은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시장규모가 꽤 넓었고 음식도 깔끔해 보였다. 우리는 블로그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한 소머리국밥집에 들어갔다. 가리는 거 없이 이것저것 잘 먹는 내게도 살짝 비릿한 향이 느껴질 정도였지만 시장이 반찬이라고, 맛있게 한 그릇을 뚝딱 다 먹었다.


 우린 시장 구경을 하며 추석 때 비싸서 사지 못했던 샤인머스캣을 비롯한 과일과 채소를 잔뜩 샀다. 차에 오르자마자 아들은 잠이 들었다. 

  "오랜만에 많이 걷고, 배부르게 먹었다고 금방 자네."

 이미 제법커서 총각이 된 아들이지만 우리 부부 눈에는 아직 아기 둥이로 보인다.

  "서진아, 우리 시간 나면 오늘처럼 자주 걷자. 둥이에게도 분명히 좋을 거야. 이렇게 가족 다 같이 산책하고 소소한 음식 먹으며 행복해하고. 난 이렇게만 살면 정말 좋겠어."

  "그렇게 해. 대신, 다음번 걷기 코스는 내가 고를게. 좀 더 쉬운 코스로."

  "그래, 그렇게 해. 어디든 너랑 둥이와 걷는 다면 좋을 것 같아."


 올해 가을을 건강하게 시작한 것 같아 뿌듯하다. 산 위에서 봤던 예쁜 하늘처럼,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고 밝게 생활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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