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의민족의 아이디어 원천은 어디인가요?
이 질문을 들을 때마다 생각한다. 우리의 크리에이티브는 어디서 나오는가.
우리의 회의는 어떻게 이루어지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생각해보았다.
유나 선임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외부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몰랐는데 입사해보니 알겠더라구. 이런 공간에서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마케팅을 할 수 있었구나. 공간이 주는 힘이 어마어마하네."
클래식한 공간에 들어서면 괜히 근엄해야 할 것 같고 옷매무새도 한 번 가다듬게 되고, 반대로 캐주얼한 카페에 가면 앉은 자세도 편해지고 말도 더 자유롭게 하게 되잖아요. 의식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공간이 주는 무의식적 반응이죠. 사실 그 사람의 본질은 크게 변하지 않는데, 장소에 따라 마음가짐이나 행동방식이 지배를 받게 되는 거죠. 그래서 공간을 창의적으로 만들면 구성원의 창의성도 발휘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새 사무실은 창문 너머 올림픽공원 ‘평화의 문’이 내려다 보여요. 이런 점에 착안해 혁신적인 스포츠 선수들을 모티브 삼아 각 층을 테마가 있게 디자인했어요. 저희 구성원들이 스타트업 정신을 잃지 않고 끊임없는 혁신의 영감을 받도록!
- 우아한형제들, 김봉진 대표님
나는 주변의 영향을 워낙 많이 받는 사람인지라 이 공간 속에서 지난 4년 동안 정말 많이 변했다. 우리 회사의 공간들이 나에게 끼친 영향력이 참 많은데 내 변화 위주로 정리해보았다.
1. 백번의 말보다 한 장의 포스터와 시트지
전 직장에서 내가 일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원장님이 생각하는 우리 병원의 비전이 뭔지 몰랐던 점이었다. 원장님과 구성원들이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우리가 무엇을 향해서 일을 하고 있는지 머리 속에 잘 그려지지 않았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모든 직원이 그랬었다. 그리고 '지각하지 마라, 환자한테 잘해라.'라고 매번 말씀하시는 것도 반복되니 잔소리처럼 느껴졌었다. 혼자 내성이 생긴 것일까?
그런데 배달의민족에 와서 놀랐던 점은 대표님이 자주 말하지 않는다. 대신 놀라울 정도로 많은 포스터, 강력한 메시지를 담은 시트지 문구들이 회사 곳곳에 붙어있었다. 이런 메시지를 4년 동안 매일매일 봤으니 어느 정도 세뇌를 당한 것 같다.
백번의 말보다 강력한 메시지 한 줄이 나의 행동을 변화시켰다.
의미 있는 메시지는 간결하며 의도를 나타내는 언어와 명확하고 강렬한 시각적인 디자인으로 이뤄진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 방을 청소하시오'처럼 짧고 그 의미가 명확해야 한다. 게시물이 일관성을 지니도록 같은 폰트와 어투를 사용해야 한다.
-make space/스콧 둘레이, 스콧 위트호프트
2. 둥글게 둥글게 앉아서 하는 회의
이사님은 우리와 회의를 할 때 꼭 둥글게 앉아서 하려고 하신다. 이유는 둥글게 앉아서 회의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회의 결과물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긴 직사각형 테이블에서 하거나 이사님이 한 편에 서있고 나머지 멤버들이 쳐다보는 형태의 회의보다 둥글게 캠프파이어 형태로 앉았을 때 회의가 활발하게 진행된 적이 많았다.
그래서 회의실 세팅은 정말 중요하다.
스탠퍼드 대학의 스콧 위트호프트에 의하면 둥글게 앉아 서로를 바라보고 눈높이가 맞을 때 사람들은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에 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의도적으로 둥글게 앉을 때도 있지만 올해 새로 이사 온 회사의 대부분 공간은 둥근 회의실이 많아서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우리가 원하는 회의가 이루어진다. 그래서 대부분의 회의가 잘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공간과 상관없이 회의가 안될 때도 많다.)
3. 서로를 배려하는 디자인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곳이고 내가 제일 좋아하기도 한다. (계단 공간을 좋아하게 되다니)
살면서 수많은 계단을 다녔지만 어떤 건물에서도 볼 수 없었다.
위에서 내려오는 사람과 문을 여는 사람, 그리고 올라오는 사람까지 모두를 배려하는 디자인이라고 생각했다. 서로 부딪히지 않기 위해 만든 선, 그리고 문구들.
가슴은 뜨겁게 발밑은 조심하게
또 좋아하는 것 중 하나는 정말 많은 콘센트 구멍이다. 카페에서 컴퓨터를 사용할 일이 있을 때 콘센트 많은 카페가 좋듯이 회사 안에 콘센트 꽂을 곳이 많아서 좋다. 어디에서나 노트북을 들고 다니며 일할 수 있고 핸드폰을 쉽게 충전할 수 있어서 정말 편하다. 옆사람과 콘센트 구멍 하나를 놓고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이런 사소해 보이지만 중요한 공간들.
상대방을 배려하는 법을 배우고 디테일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4.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는 프로필 사진
처음엔 구성원들의 사원증 사진들을 무더기로 모아놓으니 너무 무서웠다. '이 액자들을 붙여놓으라는 대표님은 대체 무슨 생각이실까?'라고 생각했었다. 특히 불을 끄면 더 무서웠다. 그런데 볼수록 재밌는 공간이다. 각 구성원들이 사원증 사진을 찍을 때 어떤 컨셉으로 찍었느냐에 따라 구성원 한 명 한 명의 개성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이 액자가 있는 공간은 외부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인지라 손님들이 오셨을 때 특히 흥미롭게 바라보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렇게 구성원을 드러냄으로써 현재 조직의 문화를 알리는 기능을 하는 것 같다.
5. 회사 안에 있는 나만의 사적인 공간들
우리 회사는 파티션이 없다. 딱딱한 분위기를 지양하고, 잡담을 주고받으며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렇게 대부분의 공간이 개방되어 있는 대신에 사적인 공간들도 정말 많이 있다.
우리 회사에 있는 이런 사적인 공간들을 나는 '골방' 또는 '독서실'이라고 부르는데 혼자 집중해서 일을 해야 할 때는 이 공간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난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기에 이런 공간이 없었다면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신기하게도 어떤 연구결과에 의하면 너무 개방되어있고 공용 공간만 있을 경우 구성원들이 소속감을 더 못 느끼기도 한다더라.
6. 요알못도 요리하게 만드는 공간
요즘 나 자신에게 제일 놀라운 점은 내가 요리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음식을 먹고 싶은 곳에서'라는 비전을 갖고 있는 회사이기에 회사 곳곳에 요리와 가까워질 수 있고 요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많다.
난 원래 배달음식만 먹었던 자취생이었다. 요리에 흥미도 없었고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요리하는 것이 무척 재밌다. 왜 재밌는지 생각해봤더니 내가 요리를 해줬을 때 행복해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좋아서였던 것 같다.
회사에서 나에게 처음 요리를 해준건 근미짱이었다. 배민쿡의 재료를 갖고 회사 키친에서 요리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 근미짱이 나와 영모님을 위해 요리를 해줬었다. 지금도 그날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맛도, 정성도 듬뿍-
음식이라는 것이 참 묘하다. 사람들의 행복한 순간에 꼭 존재하기 때문에.
그 이후로 나도 누군가를 위해 요리를 하게 되었다.
사실 요리라고 부르기엔 허접하지만 요리에 전혀 관심도 없고 하지도 않았던 나에겐 정말 큰 변화중 하나.
7. 영감을 주는 작은 미술관
우리 회사는 때론 나에게 작은 미술관이 되기도 한다. 모든 곳이 우리 디자이너들의 작품이다.
잠시 휴식의 공간이 되기도 하고 영감을 주는 공간들이다.
8. 디테일의 끝, 곳곳에 배어있는 병맛 감성
이 곳은 작은 물건에서부터 오픈된 큰 공간까지 절대 유머를 잃지 않는다. 배달의민족 브랜드 가이드이기도 한 '풋' 웃기고 '아~' 공감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이 사방에 존재한다. 몸속에 병맛 코드가 스며드는 느낌이다.
변기 앞에서도 놓치지 않는 센스!
계속 이렇게 보이는데, 우리만의 B급 코드를 절대 모를 수가 없다.
9. 필요한 소음, 흥을 돋우는 음악
파티션을 없앤 것처럼 '자유로운 대화'와 '잡담'을 이끌어낼 수 있는 편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트는 음악.
너무 조용한 도서관보다 약간의 소음이 있는 카페에서 집중이 더 잘 되는 것처럼 이 곳에서 트는 음악도 그런 역할을 한다.
나에게 음악이 하는 또 다른 역할은 '흥'을 북돋아 준다는 것. 일의 활기를 불러일으킨다. 흥을 갖고 활기차게 일 하는 것은 나에겐 정말 중요한 부분이다. (음악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죠?)
우리는 모두 공간에 지배당한다.
예쁘게 보여주려고만 하지 않은 이곳에서 나는 정말 많이 변했고 우리 구성원들도 많이 변했을 것이다.
모든 곳에 의도가 담겨있다.
그 의도대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변화한다. 결국 배달의민족의 아이디어 원천은 공간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