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다. 나중에 병에 걸릴까 봐 무서울 정도로 잘 까먹는다.
'내 머릿속의 지우개' 영화에서 알츠하이머 병에 걸려 기억을 다 잃은 수진(손예진)이 잠시 기억이 돌아왔을 때 철수(정우성)에게 편지를 쓰는 장면처럼, 요즘엔 순간순간의 내 감정들을 기록한다.
여행지에서 내가 순간순간 느꼈던 감정들,
누군가와 헤어지고 다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을 때의 그 감정.
그리고 어떤 것을 골똘히 고민할 때 드는 나의 생각들.
#1
예전에 회의를 하고 나왔는데 내가 생각했던 회의의 내용과 멤버들이 생각했던 회의 내용이 달라 놀랐던 적이 있다. 자유롭게 의견들을 주고받았던 시간이라 생각해서 아무것도 적지 않았던 나는, 그 회의 때 어떻게 이야기가 흘렀고 어떤 순간에 아이디어가 발전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지금은 그 회의가 뭐였는지 조차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으니까.)
그런 나를 지켜보던 준용 책임님이 어느 날,
"회의록은 기본이에요. 모르겠으면 다 써요. 아주 세세한 것 까지 다 기록해요."
생각해보면 첫 직장이었던 일리노이 치과에서도 진료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치과 용어가 뭔지, 환자들에게 어떻게 상담을 해야 할지 하나도 몰랐던 나를 살려주었던 것도 '메모'였다. 작은 수첩을 매일 유니폼 주머니에 넣고 들리는 대로 적고 저녁에 집에 돌아가서 몰랐던 내용들을 컴퓨터로 검색해보며 공부하고 다시 블로그에 기록해두었다. 그렇게 매일매일 나의 업무일지를 적었다.
누구 보라고 적는 것이 아니다. 일을 잘하고 싶었고, 모르면 혼날까 봐 무서웠던 절실한 나의 생존 기록들이었다.
하지만 다음 날만 되면 보란 듯이 까먹었다. 그러면 다음 날도 또 받아 적고 또 적고, 계속 적었다. 그렇게 수첩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적고 다녔는데 어느 순간 적지 않아도 될 정도로 현장에서 여유로워진 나를 발견했을 때 되게 기뻤다. 그렇게 오른쪽 주머니에 매일 넣고 다녔던 수첩은 졸업했다.
#2
회사에 갓 입사했을 때 메모장을 들고 다니는 사람과 그냥 귀로 듣고 있는 사람이 있다. 회의에 들어왔을 때 회의록을 쓰는 사람과 안 쓰는 사람이 있다. 기록을 하는 사람과 안 하는 사람의 업무 능력과 생각의 차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는 것 같다. 그만큼 기록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나의 '존재감'을 만들고 많은 도움이 되었던 <기록 도구>들을 적어보았다.
1. 블로그 (2006~현재)
2006년 9월 19일부터 시작했다. 나의 포트폴리오이자 일기장이다. 총 1,442건의 기록물이 있다. 이 블로그를 통해 검색 상위 노출이라는 개념과 온라인 마케팅에 대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나의 일상, 여행기록, 필름 사진기록, 업무 기록, 강의 후기, 영상 제작물 등이 담겨있다.
2. 페이스북 (2010~현재)
2010년 10월부터 시작했다. 페이스북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알았고 만나게 되었고 페북에 올린 나의 글을 통해 결국 배달의민족까지 입사까지 하게 되었다. 예전엔 이곳에 사진을 올리거나 글을 썼었다면 요즘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스크랩하는 용으로 쓰고 있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가장 빠르게 접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며 내가 하는 일을 가장 빨리 알릴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https://www.facebook.com/flyfany07
3. 인스타그램 (2012~현재)
2012년 9월 20일부터 시작했다. 나의 사진앨범이다. 총 1,540건의 기록물이 있다.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다양한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사진을 더 열심히, 욕심내며 찍게 되었다. 주로 여행지, 날씨에 따른 풍경, 빈티지 컵, 필름 사진 등을 찍어 올린다. 총 비공개 계정 1개와 공개 계정 2개를 운영하고 있다.
*instagram @lovebrander (개인 계정)
*instagram @___usedproject (내가 쓰던 중고제품을 판매하는 계정)
4. 브런치 (2016~현재)
2016년 1월 31일부터 시작했다. 2016년 1월, 몸이 안 좋아져 수술을 했을 때 '이렇게 일을 하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이 들어 퇴사를 하고 싶었다. 그 때 배달의민족에서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때부터 하나하나 내가 이 곳에 와서 배운 것들과 느꼈던 것들에 대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총 18개의 글이 있다.
5. 에버노트/아이폰 메모 App
책을 읽다 좋아하는 구절을 발견했을 때, 여행 계획을 짤 때, 빠르게 어떤 메모를 해야 할 때 이용한다. 사람들에게 내가 정리해놓은 것(여행 계획, 강연 내용 요약)들을 공유해야 하고 체계적으로 어떤 정보를 모아놔야 할 때에는 에버노트를 이용하고 빠르게 어떤 것(계좌번호 같은 것)을 적어놓아야 할 때는 아이폰 메모 앱을 이용한다.
6. 편한 가계부 App (2017~현재)
2017년 1월 1일부터 시작했다. 매일매일 수입, 지출한 것들을 상세히 기록해놓는다. 처음엔 귀찮았는데 10개월째 매일 하다보니 습관이 되었다. 데이터가 10개월 정도 쌓이니 나의 소비패턴도 그래프로 볼 수 있고 돈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커피 값을 줄이는 건 참 쉽지 않다.
7. 카카오톡 개인 채팅방
사진을 PC에서 모바일로 옮길 때 또는 반대로 모바일에서 PC로 옮길 때 쓴다. 그리고 SNS에 콘텐츠를 올릴 때나 메일을 보내기 전에 점검 차원에서 이 곳에서 테스트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채팅방은 지나간 것들을 잘 보지 않기 때문에 많이 중요한 것은 이 채팅방에 기록해두진 않는다.
8. 2017년 배민 다이어리
회사에서 쓰는 업무용, 집에서 쓰는 일기용이 있다. 일기용 다이어리에는 개인적인 스케줄과 하루 일기를 쓰고 회사에서 쓰는 업무용은 매일매일 해야 할 체크리스트를 적는다. 개인적인 다이어리에는 스티커도 붙이고 영화티켓, 영수증을 마스킹 테이프로 붙이기도 하며 소소한 나의 일상들을 예쁘게 기록해두는 편이다.
9. 여행 노트
여행지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기록해둔다. 원래 개인 다이어리에 일기로 적거나 에버노트에 적곤 했는데 언젠가 여행 책을 내보고 싶어서 여행 기록을 따로 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노트에 쓰면 마음 가짐도 조금은 달라지는 것 같다. 많은 여행을 했지만 여행을 손으로 기록해놓은 노트는 아직 제주도, 일본, 상해, 베를린뿐이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당시의 감정들을 다 까먹기 때문에 여행지에서 바로 적는 기록이 참 좋은 것 같다. 블로그에 여행 후기 포스팅을 해놓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10. 구글 문서
회사에서 하는 모든 회의와 강연 요약은 구글 문서에 기록한다. 씀과 동시에 자동 저장될 뿐만 아니라 협업하는 팀원들에게 공유하기에도 좋고 온라인 상에 기록이 남기 때문에 어떤 곳에서 접속해도 이 워드 파일에 기록된 것들을 볼 수 있어서 편하다.
https://docs.google.com/document
11. 아이폰 카메라, yashica T5 카메라
모든 것을 사진과 영상으로 남기려 한다. 나의 삶을 기록하는 도구이자 내가 가장 애정 하는 '카메라'.
내 주변의 행복한 순간, 멋진 순간, 기억에 남는 순간을 찍고, 올리고, 추억한다. 사진으로 기록한다.
이렇게 오늘도 난 나의 '기록'들에 대해서 글과 사진으로 브런치에 기록했다. 기록하면 생각하게하고 생각하면 행동하게 하는 '모두의 기록'을 위하여.
쉬지 말고 기록하라
기억은 흐려지고 생각은 사라진다
머리를 믿지 말고 손을 믿어라
- 다산 정약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