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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희 May 18. 2018

집이 나보다 위대해 보이면 안 되잖아요

 이사를 했다.

서울로 갑자기 이직하게 되었을 때 서울에서 살 보증금이 없어서 아는 언니네서 1년을 얹혀살았고 그 후 3년은 고시원 건물 위에 5평도 안 되는 조그만 원룸에서 살았다. 그전에 살던 곳보다 조금 더 넓은 집으로 이사했으니 나만의 공간을 제대로 만들고 싶었다. 새로운 이 공간을 어떻게 꾸밀지, 내 머리 속은 온통 인테리어 생각뿐이었다.


이사한 집

조명, 스피커, 블라인드, 테이블, 의자, 이불 커버, 화분, 식기 등등.

갖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은 넘쳐났다. 인스타그램 검색부터 시작했다. 내 취향으로 꾸며놓은 사람들의 집, 내가 평소 좋아하는 공간들은 어떤 제품들을 쓰고 어떻게 꾸며놓았는지 보았다. 그런데 하나하나 검색을 해보니 내 눈에 예쁘고 좋은 것들은 하나같이 가격도 비싸고 전통 있고 멋있는 브랜드들의 제품이었다. 인테리어 위시리스트엔 멋지고 쿨한 브랜드들로 채워져졌다.

내 침대 옆에 루이스폴센 또는 앤트레디션 플라워 팟 스탠드가 놓여있고 소파는 가리모쿠 의자 조그만 거 있으면 좋겠고. 이케아 큰 원 테이블에 의자는 세스카 체어 두 개가 있으면 참 좋겠는데! ㅠ_ㅠ 일리 캡슐머신이나 발뮤다 토스터기, 플러스마이너스제로 청소기가 좋을 것 같고... 디터람스 턴테이블도 하나 있었으면 정말 정말 좋겠다.


이사하고 공간을 채울 때 했던 생각들이다. 근데 계속 이런 생각들이 '나 같지 않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꼭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이 브랜드들을 왜 사고 싶은 거지?

왜 이것들로 채워 넣고 싶은 거지?

나, 너무너무 너무 개성이 없는데???


좋은 브랜드를 소비하면 유의미한 경험을 할 기회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좋은 경험을 만들어줘야 하는 마케터들은 멋지고 쿨한 브랜드들을 소비하는 것은 필수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이사를 할 때 나 자신에게 뭔가 내키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


브랜드 하나하나의 제품들의 쓰임새와 스토리들을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나? 아니요?

그 브랜드들을 소비한다고 해서 그게 결국 나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일까? 다는 아닐걸요?


그래서 이걸 다 사서 채우고 예쁘게 사진을 찍은 다음에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이 브랜드들을 쓰는 저는 바로 이승희입니다. 나야나! 그래요, 저! 저 짱 멋지죠? '좋아요' 누르고 가세요.


'절대적인 과시용 인테리어'가 되어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가 '그 스탠드는 왜 사고 싶은데?'라고 물었는데 왜 사고 싶은지에 대해서 명확히 대답을 못했다. '그냥 예뻐서요.'라고도 대답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간만큼은 그 공간을 이루는 것들이 제일 나 다워야한다고 생각한다. 나라는 사람이 진득하게 묻어나는 공간을 만드는 게 이리도 어려운 일이었다니.


그러던 어느 날 이사님이 나에게 물었다.

"숭에게 어떤 집이 되었으면 좋겠어?"

"(....!!!) 음, 저는 큰 창을 좋아하고 빛이 잘 들어오는 게 좋아서 그런 집을 구했어요. 이번엔 사람들에게 가정 식당처럼 요리를 해줘보고 싶어서 일본 식당 같았으면 좋겠어요. 매일 책을 보니까 책을 보는 공간도 별도로 있었으면 하고.... 그리고 음악을 좋아하니까 뮤직바처럼 음질이 좋고 카페처럼 항상 음악이 흘러나왔으면 좋겠고..."

"그러면 이승희의 카페를 만들면 되겠네! 그리고 창 앞에는 안락의자를 하나 두면 좋겠다. 집에 들어왔을 때 항상 앉게 되는 의자가 있어야 해. 의자가 없으면 사람들은 대부분 침대로 향하게 되거든. 료칸 가봤어? 료칸에 가보면 큰 창 앞에 안락의자와 그 옆에 작은 협탁이 있어. 풍경삼아 만들어놓은 그 공간이 자는 곳과 분리된 완벽한 공간이 돼. 그래서 거기서 음악도 듣고 책도 읽는 거지. 큰 창 앞에 그런 공간을 만들어봐. 그러면 좋은 스피커와 독서 의자가 있어야겠네."


료칸


이사님의 질문을 듣고 아차 싶었다. 내가 이 집을 꾸밀 때 나 자신에게 선행됐어야 할 <질문>이었다. 평소에 에버노트에 어떤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적어둔 것도 있었는데 왜 생각하지도 못했을까?




가방이 나보다 위대해 보이면 안 되잖아요. 내가 먼저 드러나야지
by. 조수용/B캐스트 PORTER 편


 가끔씩 내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 제일 매력 없는 사람은 좋은 브랜드로 둘러싸여 있는데 그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고 브랜드만 보일 때이다. 후줄근한 티셔츠를 입어도 빛나는 사람이 있고 아무리 좋은 브랜드를 소비하고 있어도 멋없는 사람이 있다. 집도 똑같다. 아무리 명품 브랜드로 집이 이루어져 있어도 그 공간이 하나도 안 멋있을 수 있다. 결국 그 공간을 채우는 사람이 중요하다.


적어도 나는 이 공간에서 내가 가장 돋보였으면 한다. 나를 이루고 있는 것들이 철저히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수단>이 되었으면 한다. 그 브랜드들을 모시고 사는 게 아니라 쿨하게 대하는 나였으면 한다. 내가 선망하고 소비하는 브랜드가 나를 나타내 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착각하고 자만하지 않았으면 한다.


자, 이제 내 공간을 만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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