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은 살림하고 아이 키우며 느끼는 일상의 행복과는 결이 다른 기쁨을 준다. 그리고 결이 다른 고통도 준다. 나의 고통은 주로 완벽한 번역에 대한 집착으로 인한 것인데, 연차가 쌓일수록 오히려 그것이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깨달음만 선명해질 뿐이다.
원문에 집착할 땐 내가 너무 고지식한 사람 같고, 유려한 문장에 집착할 땐 내게 너무 룰이 없는 것 같다. 작가의 편에 서서 모호한 문장을 모호하게 지켜내면 독자들을 외면하는 것 같고, 독자의 편에 서서 함축적인 문장을 친절하게 풀면 네가 문학을 아냐고 작가가 멱살을 잡을 것 같다. 편집자의 요구를 반영할 때엔 내가 줏대 없는 인간 같고 내 주장을 관철하려 하면 내가 소통 불능의 고집 센 번역가인 것 같다.
아름다운 문장을 좇다가 오역의 범주에 들어서는 일은 없어야 하기에 고민 끝에 다소 투박하게 번역해 놓으면 편집부에서 좀 더 매끄러운 문장을 제안하고, 내가 좀 과하게 멋을 부렸다 싶은 문장들을 편집부에서 정직하게 되돌려놓는다.
번민의 시간은 초보 번역가 시절에 다 지나와서 이제는 한순간의 머뭇거림도 물 흐르듯 우아하게 번역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실상은 결코 그렇지 않다. 고민의 시간은 여전히 길고 확신의 기쁨은 지속되지 않는다. 완벽한 번역을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나의 번역은 그저 이 작품에 대한 나의 읽기일 뿐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것 한 가지만은 꼭 지키려고 노력한다. 바로 내가 만나는 모든 작품의 ‘반짝임’을 사수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책을 만날 때마다 예민하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내가 최우선으로 지켜야 할 바로 그 ‘반짝임’을 찾아 다치지 않게 보물 상자에 넣어둔다. 반짝임은 작가를 작가이게 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독특하다 못해 기괴한 문장일 수도 있고, 번역가를 골탕 먹이려고 작정했나 싶을 정도로 끝나지 않는 긴 문장일 수도 있고,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풍경 묘사일 수도 있다. 그런 반짝임이 없는 작품은 만난 적이 없다. 물론 무엇을 작품의 ‘반짝임’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판단 또한 번역가마다 다르겠지만 말이다.
나의 번역을 원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있었고 덕분에 내가 오랫동안 이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건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다. 내가 아무리 이 일을 사랑해도, 이 일을 오래도록 할 수 있었던 건 나 혼자만의 결정일 순 없었다.
책 표지의 ‘빗방울 옮김’ 은 빗방울의 생각과 판단을 거친, 빗방울이 생각하는 가장 좋은 번역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내게 번역을 맡겨준 편집자의 생각과 판단도 담겨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생각과 판단은 완벽할 수 없다. 어쩌면 ‘완벽하지 않음’이야말로 번역의 숙명이 아닐까. 그 숙명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이 일은 오직 고통뿐일 것이기에.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어느 작가 선배는 삶과 글이 일치하는 삶을 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고 내가 보기에는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다. 내가 그 선배에게, 선배는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면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완벽하게 일치하긴 어렵겠지. 다만 그런 삶을 지향할 뿐.”
그 선배의 표현을 빌어 나도 이렇게 말해본다.
“내 번역이 완벽할 순 없겠지. 다만 완벽한 번역을 지향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