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20여 전의 어느 날, 네 살짜리 큰 아이가 밤새 고열과 설사로 몹시 아팠다. 다음 날이 마감이라 혼이 나가 있던 나는 밤을 새워 일하느라 아이가 열이 나는 것도 아침이 되어서야 알았다. ‘의약분업’, ‘의료파업’이라는 같은 단어를 뉴스에서 듣긴 했지만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달려가 닫힌 문에 붙어 있는 안내문을 보고 나서야 의료파업이 나의 일상에도 영향을 미치는 중대 사건임을 알게 되었다.
동네 병원들이 모조리 문을 닫는 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어서, 아픈 아이를 안고 설마... 설마... 하며 온 동네를 뛰어다녔는데, 정말로 문을 연 병원이 하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 해열제를 먹이고 수건을 적셔 아이 몸을 닦아주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였다. 엄마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갑자기 설움이 북받쳤다. 내일까지 마감해야 하는데,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잤고, 애는 많이 아프고, 병원은 전부 다 문을 닫았고.... 내 얘기를 듣고 대충 상황을 파악한 엄마가 달려왔다. 엄마가 아이를 돌보는 동안 나는 방을 들락거리며 일을 해서 겨우 원고를 겨우 마감할 수 있었다.
첫째가 초등학교 입학하면서 둘째가 태어났고 그 이후 더 정신없는 날들이 이어졌는데도 내가 유독 그날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건, 날 도와주려고 집으로 달려왔던 엄마가 내게 해 준 말 때문이었다. 엄마는 힘들다고 울먹이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일 그만둘 생각은 하지 마. 힘들어도 이 시간은 다 지나간다.’
내가 일을 그만두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그저 힘들다고 했을 뿐인데도, 엄마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촉망받는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엄마는 결혼하고 쌍둥이를 임신하면서 할 수 없이 악단을 그만두었다. 같이 바이올린을 전공한 동기들이 커리어를 쌓고 교향악단의 단장이 되는 동안, 엄마는 시어머니 모시고 살며 네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했다. 일 년에 한두 번 낡은 바이올린을 꺼내 늘 똑같은 곡을 연주하고 도로 넣어놓곤 했는데, 그 마저도 세월이 흐를수록 연주가 중간에 끊기고 소리도 거칠어졌다. 엄마는 바이올린을 도로 케이스에 넣으면서 꼭 하는 말이 있었다.
“이다음에 결혼하면, 절대 살림하고 애 키운다고 일 그만두지 마라. 두고두고 후회해. 돈을 많이 벌 필요도 없고 대단한 일일 필요도 없어. 그저 네가 좋아하는 일이면 돼.”
그 말이 뇌리에 박혔는지 일과 일상이 수렁처럼 느껴지는 시간 속에서도 번역 일을 그만 둘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간헐적으로 베이비시터와 가사도우미의 힘을 빌리긴 했어도, 가족 중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두 아이를 내 손으로 키웠고 집안 살림하며 일도 지킬 수 있었다.
집에서 일한다고 하면 일과 육아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솔직히 지난 25년 동안 토끼는 구경도 못했다. ‘돌멩이 하나로 두 마리 새를 잡는다 To Kill two birds with a stone는 영어 표현에 빗대어 보자면, 두 마리 새를 잡아보겠다고 돌멩이를 쥐어본 적조차 없었다. 토끼도, 새도, 그것 한 마리 잡으려고 온 신경을 집중해도 잡을 수 없는 민첩하고 날렵한 동물이라는 것만 확실하게 알게 되었을 뿐이다. 일에 파묻혀 아이들을 살뜰히 보살피지도 못했고 일상에 묶여 번역일을 마음껏 하지 못했다. 아이들에겐 늘 미안했고, 일은 늘 아쉬웠다.
아이들이 자라고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원 없이 일만 해보리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들만 자란 게 아니라 나의 시력과 체력도 세월과 함께 나빠져서 번역 속도가 예전 같지 않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아도 어깨와 목이 뻐근해서 수시로 일어나야 하고 마감을 맞추기 위해 밤을 새우는 건 상상도 못 한다. 스포츠카가 어울리는 나이에는 스포츠 카 살 돈이 없고, 막상 스포츠카를 살 돈이 생기면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처럼, 우리 삶의 조건이라는 건 왜 늘 한 가지가 빠지는 건지.
그러나 지금 이 나이에 체력이 아닌 다른 조건이 빠졌다면, 내가 그토록 지키려 애썼던 것들을 지키지 못했다면 나는 얼마나 더 쓸쓸했을까. 엄마가 수시로 혼이 나갔어도 아이들은 잘 커 주었고,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나의 일도 여전히 매일 새벽 나를 기다리고 있다. 지키려 애썼던 것들이 다 내 곁에 있다. 더 이상 무얼 바라겠는가.
문득문득, 구경도 못했다고 생각했던 두 마리 토끼, 혹은 두 마리 새가, 이미 내 곁에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