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 “어디 갔다 와?”
아내 : “왜? 난 쇼핑도 못해?”
이것은 어느 부부의 실제 대화다. 오래전 어느 남자 선배가 주말에 아내와 나눈 대화라며 내게 들려준 이야기다. 선배는 아내가 자기 질문에 왜 그런 식으로 삐딱하게 대답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선배가 퇴근했는데 아내가 없어서, 대충 저녁을 때우고 기다렸는데, 아내가 쇼핑백을 잔뜩 들고 들어섰다. 쇼핑을 하고 왔나 보다, 짐작은 했지만 따지고 비난할 뜻은 없었다. 그래서 어디 갔다 오는 거냐고 물었던 건데, 아내는 몇 단계를 건너뛰어 자기가 한 질문의 의도를 지레짐작하고 화를 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사건을 ‘행간의 의미’를 읽히고 싶지 않은 남편과 ‘행간의 의미’를 과도하게 읽은 아내의 충돌 사건으로 기억한다.
행간의 의미는 번역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중요한 화두다. 수년간 나의 영어 해결사 역할을 해주고 있는 미국인 교수님은 내가 모호한 원문의 의미를 질문할 때마다, ‘영어에서 모호한 건 한글로도 모호하게’ 번역하면 되지 않느냐고, 너무 고민하지 말라고 한다. 그 말도 일리는 있지만 실제 번역 현장에서 모호함은 그렇게 간단히 정리될 문제는 아니다. 문장의 모호함은 행간의 의미를 어디까지 읽느냐의 문제인 경우가 많은데, 행간의 의미를 과하게 읽으면 문장이 신비롭지 않고, 너무 안 읽으면 무슨 소린지 종잡을 수 없는 문장이 되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이 아닌 현실 속 언어의 모호함에 관해서라면 나에겐 나름 해결책이 있다. 항상 말을 모호하게 하는 사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애매하게 표현하는 사람을 상대할 때 나는 행간의 의미를 ‘일부러’ 읽지 않는다. 나 역시 말을 아주 직설적이고 명료하게 하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나의 기준에도 늘 말을 지나치게 얼버무리고 모호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상대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내기 위해 스무고개를 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면 참 피곤하다. 그런 경우 눈치 없는 인간으로 찍힐 각오를 하고 한 번쯤 상대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본다. 그러면 다음번엔 상대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좀 더 명확하게 말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내가 생일 선물로 뭘 갖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상대가, 뭘 그런 걸 신경 쓰냐고, 정 뭐라도 사고 싶으면 그냥 양말 짝이나 사라고 말한다면, 실제로 양말 짝을 사는 것이다. 상대가 내게 원한 건 결코 ‘양말 짝’ 따위는 아니었겠지만,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 (이것은 나의 경험담이다) 상대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것의 대가는 '눈치 없는' 사람이 되는 것 정도이고 그렇게 해서 반복되는 피로감을 덜 수 있다면 그 편이 낫다는 게 내 생각이다. 지기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다고 가혹한 비난을 퍼부울 사람은 없다. 물론 그 대가가 치명적인 상황에서는 조심해야 하겠지만.
그런데 내가 번역하는 작품의 원문은 하고 싶어도 스무고개를 할 수도 없고 한 번 출간이 되고 나면 다음번 기회도 없다. 원문의 모호함이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번역가가 무딘 탓인지도 알 수 없는 데다, 행간의 의미를 읽는 게 옳은지, 읽는다면 어디까지 읽어야 하는지, 또 어디까지 드러내 주어야 하는지, 그게 번역가의 일인지 독자의 일인지 모든 게 고민스럽다. 시적이고 아름다운 함축적이며 암시적인 문장이 주를 이루는 문학 작품일수록 그런 고민은 더 깊어진다. 작가에게 직접 물어서 해결되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에이전시 수준에서, '알아서 하라'는 식의 답변을 받는 경우도 의외로 많다.
어디 갔다 오느냐는 남편의 질문에는 비록 본인은 의식하지 못했을지언정 아주 조금의 힐난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이미 방어적인 태도로 집에 들어서고 있던 아내는 즉각적으로 행간의 의미를 '짐작'하거나 '간파'하고 방어적이거나 공격적인 답변을 했을 것이다.
번역 일이 직업이 아니어도 일상에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늘 행간의 의미를 읽는다. 문학작품이 아닌 일상 언어의 번역에서 나는 과연 어떤 번역가 일지 문득 궁금해진다. 나는 사람을 대할 때 행간의 의미를 얼마나 자주, 얼마나 많이, 얼마나 정확하게 읽고 있는지. 또한 정작 나 자신은 번역하기 쉬운 원문인지, 아니면 모호함 그 자체인지, 스무고개 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섯 고개 정도는 넘어야 하는 원문인지, 아름답게 모호한 원문인지, 아름답지도 않으면서 모호하기만 원문인지. 나라는 원문을 읽는 사람들이 너무 피로하지 않을 만큼만 모호한 원문이면서 너무 속을 다 드러내버리는 매력 없는 투명 물고기는 아니면 좋겠다.
문학작품은 사명감을 가진 어느 번역가가 밤낮으로 넘치거나 부족함 없이 그 의미를 이해하고 옮기려 고민해 주지만, ‘나’라는 원문의 행간을 읽기 위해 그 많은 시간을 투자할 사람은 세상에 없을 뿐 아니라, 그래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