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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방울 Sep 13. 2022

13 몰입의 여왕의 낯설게 하기

    

너무 오래전 얘기지만 대학시절 4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재미있게 들었던 과목은 <연극의 이해>였다. 딱히 연극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얼마나 재미있게 들었는지 지금도 강의 내용을 거의 다 기억할 정도다. 그중에서도 유독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독일 극작가이자 연출가였던 브레히트가 주장한 ‘낯설게 하기’라는 개념인데, 관객이 연극에 한참 몰입할 때 즈음, 배우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여러분, 지금까지 잘 보셨나요?”라고 묻는 식으로 관객의 몰입을 확 깨뜨려버리는 기법을 일컫는 말이다. 관객이 지나치게 연극에 몰입하면 적극적이고 비판적인 자세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일부러 몰입을 깨뜨린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몰입의 여왕임을 자부했던 나에게 당시 그 말이 얼마나 신선한 충격이었는지, 나는 한동안 ‘낯설게 하기’라는 개념에 ‘몰입’했다. 


내가 남들보다 아주 조금 더 갖고 태어난 재능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어학적 재능과 몰입하는 능력을 들 수 있다. 후자도 능력으로 쳐준다면 말이다. 


번역하는 작품에 몰입하는 건 기본이다. 얼마나 몰입하는지, 번역하는 작품이 책으로 출간되기 전에 가까운 사람들이 이미 내용을 다 꿰고 있을 정도다. 그 외에도 나는 늘 주변 사람들의 상황이나 이야기, 티브이 드라마와 영화, 음악에 지나치게 몰입한다. 공감능력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그 말로는 좀 약하다. 공감능력이 뛰어나도 나처럼 허우적대지 않고 적절한 때에 빠져나오는 쿨하고 지혜로운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 친구가 내게 고민을 털어놓으면 며칠 뒤 정작 그 친구는 이미 다른 일에 열중해 있는데도, 나 혼자 그의 고민을 고민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배신감을 느낀 적도 여러 번이다.      


얼마 전에는 내셔널 지오그래피의 다큐멘터리를 보았는데, 다리를 다친 새끼 사자를 버리고 가야 하는 상황에서 새끼 사자를 돌아보며 촉촉한 눈으로 괴로워하는 어미 사자의 심정에 얼마나 몰입했는지 하루 종일 어미 사자와 새끼 사자를 생각하며 훌쩍였다. 결국 저녁식사 자리에서도 그 얘기를 꺼냈다가 딸로부터, “엄마, 이제 밀림의 사자까지 걱정하는 거야?”라는 핀잔을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생각해보니, 몰입의 여왕인 나도 그동안 잊고 지냈다고 생각했던 ‘낯설게 하기’ 기법을 일상 속에서 꽤 잘 활용하고 있었다.  몇 달 동안 한 작품의 원문과 번역문을 반복해서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문장을 읽기도 전에 이미 읽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건성으로 보게 된다. 수정을 거듭하다가 원작에서 야금야금 멀어진 것을 인식 못하는 경우도 있고, 오탈자마저 눈에 익어서 못 보고 지나칠 때도 있다. 원문과 번역문에 너무 익숙해졌다 싶을 때 나는 일부러 청소기를 한 번 돌리거나 저녁식사 재료를 손질하고 돌아온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방금 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실수나 누락이 보인다. 일 공간과 생활공간이 분리되지 않는 게 불편할 때도 있지만 그런 측면에서 보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소설 한 권을 마감하고 나면 그동안 방치했던 집안을 낯설게 둘러본다. 우리 집에 처음 온 사람의 낯선 시선으로 집안 구석구석을 살펴보면 늘 같은 자리에 있어서 눈에 익어버린 물건이 왜 굳이 거기 있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어쩌면 정리정돈이라는 건 과도하게 익숙해지고 편안해진 집안을 조금 낯설게 만들어 보는 건 아닐지. 


그러나 ‘낯설게 하기’가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브레히트가 의도했던 비판적인 태도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감사하는 마음이다. 연극이 아닌 일상을 낯설게 보면 감사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의 일상이 오래 입은 트레이닝 바지처럼 익숙하고  흐물흐물해졌을 때,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빗방울님, 잘 살고 계신가요?’  그리고 생각해본다. 혹시 나 자신의 삶에 너무 몰입해서 놓치고 있는 건 없는지, 너무 익숙해서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은 없는지,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늘 있었다는 이유로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지, 내가 가진 건 너무 당연해서 눈에 보이지 않고, 내가 갖지 못한 건 당연하지 않아서 속 끓이며 애달파하진 않는지.       


코로나 팬데믹과 자연재해로 일상이 헝클어졌던 지난 3년간 우리는 당연했던 많은 것들을 한 번씩 잃어보았다. 약국에서 마스크를 살 수 없었고, 카페와 식당에서 친구를 만나 반갑게 끌어안거나 웃고 떠둘 수 없었고,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일 수 없었다. 영화관에 갈 수 없었고, 공연장에 갈 수 없었고, 여행을 갈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불과 작년에 당연하지 않았던 것들을 올해 당연하게 누리면서도 감사의 마음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의 나를 낯설게 바라본다.  나는 지금 커피 한 잔을 옆에 놓고, 그리 급할 것도 없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으며 엄청 중요하거나 대단할 것도 없는 얘기를 쓰고 있지만, 지금 이 순간의 내가 있으려면 알게 모르게 얼마나 많은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하는가. 우선 나의 육체와 영혼을 잠식하는 엄청난 괴로움이 없어야 하고, 머리도 적당히 맑아야 하며, 눈도 너무 침침하지 않아야 한다. 당장 낼모레가 마감이 아니어야 하고, 급하게 처리해야 할 집안일이 없어야 하고, 아이들과 남편이 건강하고 큰 탈 없이 각자의 자리로 가 있거나 가는 중이어야 한다. 집안에서 나를 급히 필요로 하는 긴급한 상황이 없어야 하고 나를 필요로 하지 않더라도 내가 달려가고 싶은 상황도 없어야 한다. 그 모든 조건이 하나도 빠짐없이 완벽하게 충족된다는 건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고들 하지만, 태양 아래 당연한 것도 정말이지 하나도 없다. 

낯설게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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