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저러 이유가 있었지만 남편보다 조금 더 일찍 한국에 들어온 이유는 집을 구하고 살림살이를 채워 넣어 그나마 살기 편한 환경을 미리 만들겠다는 목적이었다. 물론 mbti p이자 인생의 모든 것이 벼락치기 스타일이었던 나였기에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결혼 6년 차에야 혼수를 사듯 냉장고와 세탁기를 비롯한 큼직한 생활가전을 고르는 것부터 머리가 아팠다. 아직도 나는 인터넷 쇼핑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방대한 초이스 가운데 도대체 무엇을 골라야 할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작은 것을 사더라도 이것저것 꼼꼼히 따져보고 비교하며 최적의 가격으로 최상의 물품을 찾는 사람들이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어떻게 어떻게 고르고 골라 냉장고와 세탁기를 채워 넣은 것이 결국 9월 중순이 다 되어서였다. 그전까지 이 집은 사람이 사는 꼬락서니가 전혀 아니었다. 냉장고가 없으니 요리를 할 수 없어 라면과 인스턴트로 끼니를 때워가니 식생활 습관도 점점 나빠져갔다.
무엇보다 가장 스트레스받았던 것은 '마감기한'이 없다는 것이었다. 남편의 f-6 비자 발급 타임라인이 우리의 예상보다 질질 늘어졌고 그로 인해 "이때까지는 해치워야 한다"는 마감일이 부재했다. 그 사실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인생이 벼락치기인 사람들은 마감일이 있어야 그때쯤 번뜩이는 효율성으로 일처리를 한다. 대신 기한이 없다면 한도 끝도 없이 빈둥거리는 습관이 있다.
아무튼 f-6 비자 발급이 완료되었고 갑작스럽게 다음 주에 남편이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나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8월 말부터 가야지, 가야지 하던 모던하우스에 다녀오고, 밀린 설거지를 해치우고, 제대로 된 식생활을 시작했다. 다만 재택근무를 해야 하는 남편에게 필요한 책상을 결국 늦게 주문한 탓에 9월 말에나 도착할 것 같아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그때까지는 카페 생활을 해야 할 듯싶다.
이런 나를 보면 가끔은 일정한 루틴이 생길 수밖에 없는 회사나 학교가 필요악의 존재가 아닐까 싶다. 나의 정신적 에너지를 쪽쪽 빼앗아먹지만, 신체만큼은 강제로 바른생활을 하게 만든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 처음에는 분명 시차적응이 안 되어서라고 생각했는데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나는 새벽까지 잠을 못 이루고 있다.
지금도 해야 할 일은 산더미다. 아파트 관리비 자동이체 신용카드를 찾다가 머리가 아파진 나는 다 집어치우고 또 브런치에 글을 쓴다. 관리비 마감일까지는 아직 보름이나 남아 있으니까. 내가 통제당하는 것은 싫으면서, 내 삶을 스스로 컨트롤하지 못하는 것에는 큰 스트레스를 느낀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래도 속박당하는 삶은 죽어도 싫다.
어차피 벼락치기는 내 인생에서 끊을 수 없는 삶의 양식이다. 이 또한 그냥 받아들이고 맞춰서 살아가야지 어쩌겠어. 참 대책 없고 게으른 나지만 어찌어찌 이 세상에 대충 스며들어 30년 넘게 살아왔으니 그걸로 되었다.
상반기부터 최근까지는 정신적으로 정말 힘들었다. 기나긴 터널의 시간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어떻게든 반동하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오늘처럼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간헐적으로 나를 괴롭게 만든다. 그러면 나는 게으른 몸뚱이를 일으켜 세우고 이렇게 글을 쓴다.
브런치로 옮기니까 마음의 부담감이 확 줄었다. 그놈의 키워드 때문에 머리 아프지도 않고, 내 맘대로 솔직하게 쓸 수 있다. 아무리 싫어도 매일 포스팅을 해야 할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 내 글을 읽는 사람의 수가 확 줄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행복하다.
주기적으로 내 인생을 리셋하고 싶은 충동이 든다. 그 플랫폼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내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다. 인터넷상에 존재하는 나의 삶을 세미 리셋한 기분이 든다. 이제 그곳은 지수를 높이기 위해 관련 내용을 더 많이 쓰고 간헐적으로 내 여행기나 기록할 것 같다. 이틀 만에 벌써 팔로우를 끊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 오히려 홀가분하고 좋다. 그렇게 쌓이고 쌓이다 보면 그곳은 특색은 없지만 수익은 높은 장소가 될 것이다.
내가 목표하는 것이 바로 그 지점이다. 눈에 띄지 않는 회색분자이지만 적당히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세미 디지털 노매드가 되고 싶다. 현재 나는 절대로 학교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 결국 돌아가게 된다 할 지라도, 적어도 학교가 나에게 남은 마지막 옵션은 아닌 상태였으면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정신적으로 돌아버릴 것이다. 학교가 주는 압박감이 생각보다 정말 엄청나다. 학교를 다녀도 그만, 안 다녀도 그만인 상태가 아니라면 무너지고 말 것이다.
결국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또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틀 만에 지쳤지만, 학교를 계속 다니는 상상을 하면 쓰기 싫은 것도 얌전히 쓰게 된다. 당장 올해 하반기에만 얼마나 이룰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벼락치기 인생, 상황에 맞춰서 굴러가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