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는 우리안에 우리는 장애안에

우리는 그들이 필요해요

by LoveeGracieee


장애를 우리가 생각할 때 우리는 늘 우리가 도와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은 상호적인 관계로 서로 서로를 보완함에도 불구하고 우린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죠.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데도 말입니다.


장애 친구들에게 내가 받는 이익과 유익은 무엇인가 말해보아야 겠네요.


아침에 잠을 자다가 전화가 옵니다. 목소리가 아직도 가라앉은 상태에서 겨우 '여보세요 '하고 받으면 장애인 친구가 웃으며 안부를 물어봅니다. 그리고 오늘의 스케줄을 물어봅니다. 그리고 하루종일 이따금씩 전화옵니다. 장애인 친구들은 걱정도 해주고 위로도 해주고 장난도 쳐주고 찬양도 불러주고 기도도 해주고 손도 잡아주고 나라는 사람에게 관심이 있고 나라는 사람을 바라봐 줍니다. 내가 이들을 위해 봉사하러 가지만 사실은 이들이 나를 케어해 주고 있습니다. 갑자기 궁금해 졌습니다. 성경속 특히 신약 속에서 예수님은 장애를 어떻게 바라보실까였습니다.


첫째로 장애는 개인의 죄 때문에 생긴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9:1–3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


당시 흔했던 “장애 = 죄의 결과”라는 인식을 예수님이 명확히 부정하신 장면이죠.


두번째 예수님은 장애인을 존엄한 ‘대상’이 아닌 ‘이웃’으로 대하심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맹인, 중풍병자, 말 못하는 사람, 손 마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직접 만지고, 말을 걸고, 공동체로 회복시키십니다.

마태복음 20: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단순한 치유보다 존재 자체를 존중하시는 태도가 드러나요.


세번째로 장애인은 하나님 나라의 초대받은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14:13–14 “잔치를 베풀거든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네게 갚을 것이 없으므로 복이 되리니…”


사회에서 배제되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중심에 있습니다.


네번째는 약함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은혜의 통로입니다.

고린도후서 12:9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바울은 자신의 ‘약함’(장애로 해석되기도 함)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없애기보다 함께하시기를 선택하세요.


마지막으로 교회는 ‘약한 지체’를 더 귀히 여겨야 한다

고린도전서 12:22–23 “몸의 지체 중에 더 약하게 보이는 것들이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덜 귀히 여기는 지체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장애인은 도움의 대상이 아니라, 교회에 꼭 필요한 지체라고 말해요. 결론적으로 신약이 말하는 장애에 대한 핵심은 장애는죄의 결과가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장애인은 하나님의 일하심과 은혜가 드러나는 자리이고 장애인은 하나님 나라의 우선 초대 대상이며 교회는 장애인을 “배려”가 아니라 동등한 지체로 대해야 합니다.


예수의 길은 고통을 빠르게 제거하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바깥에서 설명하거나 통제하지 않고, 그 안으로 들어오셨어요. 장애 신학에서 십자가는 “장애는 저주”라는 해석을 무너뜨리고그것은 상처 입은 몸을 지닌 하나님이 인간의 취약함과 연대하신 사건이며, 약함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와 배제되지 않는다는 급진적인 선언입니다. 부활 역시 손상 없는 ‘정상 몸’의 회복이라기보다, 상처를 지닌 채 새 생명으로 들어가신 하나님을 증언합니다.


교회론적으로 말하자면 장애인을 ‘사역의 대상’이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만 규정할 때, 교회 안에는 보이지 않는 위계가 형성되죠. 그러나 신약이 말하는 교회는 몸의 비유 안에서 약한 지체가 더 필요함을 말합니다. 이는 도덕적 권면이 아니라 공동체의 구조에 대한 신학적 진술입니다. 환대는 특별한 행사나 배려 프로그램이 아니라, 교회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를 드러내는 정체성의 문제인데, 장애인이 교회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처음부터 다양한 몸들로 구성된 공동체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는 분명 고통이 사라지고 눈물이 닦이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을 현재의 삶에 기계적으로 적용할 때, 신앙은 쉽게 폭력이 된다. “왜 아직 낫지 않았는가”, “믿음이 부족한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은 소망의 언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존재를 부정하는 말이 될 수 있다. 장애는 종말의 소망을 현재의 인간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완성의 약속은 “지금 너는 부족한 인간이다”라는 낙인이 아니라, “지금의 너와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위로와 동행의 언어로 우리에게 존재하여야 합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뉴욕 사는 여자의 워싱턴 D.C.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