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여행글 대신 잠깐 쉬어가는 의미로 시 한편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대학 시절 독문과 교양 수업을 들을때 접했던 시입니다. 독일 최고의 문학가 중 한 명인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작품을 공부하는 수업이었는데, 그의 작품들과 세계관에 매료되어서 항상 이 수업시간을 기다렸던 기억이 나네요. 다음 시는 브레히트의 <아, 어떻게 우리가 이 작은 장미를 기록할 수 있을 것인가(Ach, Wie Sollen Wir Die Kleine Rose Buchen)>입니다.
아, 어떻게 우리가 이 작은 장미를 기록할 수 있을 것인가
갑자기 검붉은 색깔의 어린 장미가 가까이서 눈에 띄는데
아, 우리가 장미를 찾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가 왔을 때, 장미는 거기에 피어 있었다
장미가 그곳에 피어 있기 전에는
아무도 장미를 기대하지 않았다
장미가 그곳에 피었을때는
아무도 장미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아, 출발도 한 적 없는 것이 목적지에 도착했구나
하지만 모든 일이 워낙 이렇지 않았던가
Ach, wie sollen wir die kleine Rose buchen?
Plötzlich dunkelrot und jung und nah?
Ach, wir kamen nicht, sie zu besuchen
Aber als wir kamen, war sie da.
Eh sie da war, ward sie nicht erwartet.
Als sie da war, ward sie kaum geglaubt.
Ach, zum Ziele kam, was nie gestartet.
Aber war es so nicht überhaupt?
며칠 전 서초동 검찰개혁 집회에 다녀왔습니다. 저녁이 되니 자켓을 입고 있었는데도 바람이 스며들며 으슬으슬 몸이 떨렸습니다. 이제는 확실히 추워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느덧 가을이 온 것을 비로소 느낄 수 있었지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제 10월이니 가을도 절반 정도가 남았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겁니다.
갑자기 찾아온 가을을 보고 문득 브레히트의 이 시가 떠올랐습니다. 여러분은 가을을 기대하고 있었나요? 아니면 지금 겨울을 기대하고 있나요? 물론 저도 찜통 같은 여름에는 빨리 시원한 계절이 오길 바라기는 했지만, 9월 1일 까지 얼마나 남았나 하루하루 날을 세면서 기다리지는 않았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처럼 어쩌다 보니 여름이 가면서 가을이 오고, 또 겨울이 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우리 주변의 많은 일들이 이렇게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어쩌다 보니 아이에서 어른이 돼있고, 어쩌다 보니 이 사람이 내 친구이고, 연인이고, 이별하고, 가정을 이루고, 죽음을 맞이하고.. 우리의 삶 자체가 이렇게 브레히트의 장미처럼 출발도 한 적 없는데 벌써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거나 좌절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명확한 출발지나 목적지가 없이 핀 장미여도, 우리는 아름답게 핀 그 장미를 보고 감상하면 되지 않을 까요? 어쩌다 어른이 된 나를 소중히 하고, 친구들, 연인들, 가족들, 나의 삶 자체를 소중히 하면 그것 또한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브레히트가 말했듯이, 모든 일이 워낙 이렇게 흘러가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