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포세대는 아니지만, 나는 무엇을 포기한 걸까?>
난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 아니다 보니 인간관계에 많은 힘을 쏟지 않고 살려고 하고 있다.
지금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일(=나)에 관련된 것들이라 '관계'라는 것은 최대한 가볍게 유지하고 있다.
요즘은 이런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다. 자발적 왕따에 가깝다.
사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다 보니 청춘들이 많은 것을 포기한다는 말을 듣고 남일처럼 참으로 안타깝게만 생각했다.
인생의 가성비(혹은 현실성)를 따져 연애를 포기하고 그에 수반되는 수많은 비용과 결혼이라는 제도까지 거부하는 사람들. N포세대다.
그런데 문득 나는 다 있는 줄 착각하며 이들에게 동정의 마음을 가졌지만,
나는 정말 포기한 것이 없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실, 나는 친구가 없다.
지인(知人)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이는 꽤 여럿 있지만, 친구라고 이 관계를 명명하기에 우리의 사이가 너무 소원하다. 게다가 내가 별달리 노력한 점이 없기에 친구라는 단어는 미안하고, 그냥 아는 인연이다.
어릴 때는 친구가 많았다. 그 시절 친구로서 연을 맺은 사람도 있지만 수십 년간 교류가 전혀 없는 사이가 되었다. 그래서 아직 그들을 친구라고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다.
지금 갑자기 내가 그들에게 전화를 한다면 아마 전화를 안 받거나(아마 도를 아십니까 아니면 다단계로 생각하고 차단할 듯) 전화를 받지만 굉장히 어색하게 부고 소식이나 무슨 일 있냐고 긴장의 목소리로 연락을 받을 수도 있다.
이제 와서 뜬금없이 옛 친구들에게 안부 인사를 하기도 이상하고 사는 얘기를 나누기도 애매한, 먼 과거에 나와 친구로서 그 시절을 보내준 소중한 존재로써 추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관계 정도다.
대학생 때는 나도 인싸였다. 말도 못 하게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즐겁고 흥미로운 청춘을 그렸다. 아무튼 그때는 내 주변에 사람은 넘쳤고, 나 역시 친구가 정말 소중했다. 평생의 우정을 맹세하기도 했다.
내가 바뀌게 된 건 취업전선에 뛰어들고 나서부터였다.
처음 신입 적응기에는 개인시간이 꽤 있었고 여전히 친구들과의 만남도 비교적 많았다. 그러나 내 인생에 대리라는 직급을 달고부터 일 이외에 아무것에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매일 야근에, 주말 근무에 정말 몸과 정신을 파괴하며 모든 삶을 일에 바친 시간을 보냈다. 누가 억지로 시킨 적은 없다. 그저 내게 주어지고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을 뿐. (근데 안 하고 싶다고 안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
악마에게 영혼을 팔듯 일에 청춘을 팔았다.
대리 10년 간이 내 인생의 암흑기였다!
심지어 대리만 10년 넘게 했다. 과장이 되고 조금 숨이 쉬어졌다.
하루의 모든 시간을 일만 보고 일만 생각하다 보니 다른 게 눈에 전혀 들어올 겨를이 없었다. 그럴수록 자꾸 일만 파고들었던 것 같다. 사람에게 이렇게 집착했으면 스토킹 신고감이다.
마치 게임 중독처럼, 언제 멈춰야 할지 모르는 '일 중독'으로 자는 동안도 일 생각을 하느라 모든 시간을 다 보냈다.
그래서 후회를 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고,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이 되어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누구나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지금 현실에서 제일 중요한 하나를 선택하면서 나머지는 포기할 수밖에 없다.
억울해할 것은 전혀 없다.
그 하나를 얻었기 때문에 다른 하나를 놓아야 할 수밖에 없다. 시간과 체력은 유한하기 때문에 기회비용을 따져 포기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어설프게 모든 것을 가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하게 하나는 가졌다. 내 일로써 스스로 전혀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비록 친구와 자녀는 없지만, 일이란 것은 확실하게 내편으로 만든 시간들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 나는 친구들과 소소하게 나누는 우정과 일상을 뒤로 미뤘다. 재미있게 놀기보다 이 일을 무사히 잘 끝내고 싶다는 생각이 앞서 있었다. 그리고 잘하고 싶었다.
어떤 것을 잘하고 싶을 때는 식사도 휴식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 일을 빨리 제대로 하고 싶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것도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밀린 업무를 빨리 해버리고 싶어서 다음날 아침을 초조하게 기다린 날도 많다.
이제는 늙어서 놀러 다닐 기운이나 의욕이 없다. 신기하게 나이가 들 수록 더 시간도 없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보다는 나 자신을 대표하는 일에 더 집중했던 시간들이 이어졌다.
남이 모르고 인정 안 해도 상관없다. 그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친구가 없다는 말이 내 인격을 대변하는 느낌 때문에 굉장히 부끄러워서, 오랜 시간 사람들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서야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솔직히 말할 수 있다.
"난 친구가 전혀 없어."
당연하다.
내가 친구들을 위해 기울인 노력이 없으니까.
과거의 인연을 지금 친구라고 포장해 버리는 건 내가 너무 야비하게 느껴진다. 그 친구를 위해 시간, 돈, 노력을 쓴 적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그 어느 것도 대답할 수가 없다. 나는 친구 자격이 없다.
다만 그 모든 시간과 노력을 일에 써왔다.
친구가 왜 필요한가? 또는 친구는 왜 중요한가?
일상에서 도움을 받기 위해서? 힘든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나는 이 해답을 아직 찾지 못했다.
어린 시절 친구는 같이 놀고 청춘을 즐기기 위해서 필요한 존재였다. 지금은 노는 것에 관심이 없다.
지금 노는 것 중에 제일 재밌는 것은 혼자 놀기이며 혼술 하기이다.
일상적 일이나 업무적으로 문제가 생겼을 때 친구의 위로가 아니라 늘 스스로 해답을 구했다. 원래 타인에게 부탁을 잘 못하는 성격이므로 친구가 있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이 있었을까 싶다. 혼자서 해결하는 것이 편하다.
그렇다고 오만 방자하게 혼자 잘나서 이렇게 성장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일에서 생기는 질문을 현장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공장, 제조사, 협력사, 파트너사 담당자)에게 직접 문의하고 눈총 받고, 욕을 먹으며, 때로는 친절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성장해 올 수 있었다. 다행히 비즈니스 관계에서 모른다고 솔직히 말하면 욕은 하면서도 많이들 도움을 준다.
이런 실질적 도움 외에 기쁨과 슬픔 같은 개인적인 감정을 나눌 존재의 역할로 친구가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도 점점 사는 게 힘들 텐데 내 힘든 얘기가 뭐가 중요할까 혹은 내가 잘 나가는 얘기 들으면 뭐가 좋을까 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그냥 어차피 내가 걸어가는 내 인생이니 힘들어도, 좋아도 나 스스로와 대화 나누고 혼자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마음을 다스리자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을 뿐이다.
그래서 혼자 명상하는 시간이 가장 위로가 빠른 시간이다. 명상이 끝나고 시원하게 혼술 하면 진짜 최고의 시간이다.
친구에게 가성비를 따지기보다는, 그저 난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바쁘고 미안해서 자연스레 거리가 생겼을 뿐이다.
어릴 때 친구는 굳이 내가 찾아가지 않아도 등교만 해도 매일 만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일상을 공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모두 다 다른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다. 만남을 위해 어딘가로 움직여야 한다. 시간을 내고 공간을 이동한다. 그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다.
우리는 하루의 1/2을 일과 출퇴근 시간에 쓰고, 나머지 남은 1/2로 잠과 기타 등등을 해야 한다. 남는 시간이 정말 없다. 이것조차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나는 출근하지 않는 모든 시간은 출근을 위해서 준비되는 시간이다.
휴식조차 다음날 일하기 위한 준비 시간이다.
회사를 다니면서 다른 것을 하는 것에 용기를 내기 어려웠다. 특히 따로 어딘가로 가서 무언가를 하기가 상당히 부담스럽다. 그래서 집에서 혼자 책 보기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됐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저녁에 시간을 내거나 무엇을 배우거나 인간관계를 위해 어딘가를 가는 것이 부담이 갔다.
다음날 출근을 위해 정신을 차분히 유지하고, 혼자 조용히 오늘의 스트레스를 푸는 시간이 좋다. 퇴근 후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노느라 쉬지 못하면 다음날 일에 분명 지장이 있었다. 사람을 만나는 시간을 내기 위해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휴식을 포기하게 된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있다.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 외의 모든 시간은 배터리 충전으로 대기중 모드일 뿐이랄까.
이렇게 살면 굉장히 재미없는 인생처럼 보이겠지만, 심약한 내가 직장생활을 버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정말이지 어쩌면 이렇게 배터리 총량이 낮게 태어났는지. 심지어 나이가 들면서 에너지 효율도 줄고 있다.
회사에서 대체로 나사 여러 개 풀린 듯, 매일 실수하고 잊어버리고 업무의 사소한 디테일도 못 챙기며 남들 실적에 편승하며 사는 사람들은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혼자만의 충전 시간이 전혀 없기 때문에 헐랭이가 되는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나도 그렇게 살 수도 있지만, 나는 그저 내가 하고 있는 모든 부분을 제대로 잘 해내고 싶다.
나는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 그리고 욕심이 많다. (부산 말로는 *애살 많은 여자다.)
*애살 : 무엇을 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마음이나 욕망(경상도 방언)
P.S.
그래서 친구가 없다.
그래도 어찌저찌 결혼은 했다.
주임시절부터 만나던 남사친과 대리 초기에 눈물의 결혼을 했다. 결혼이 감격스럽거나 행복해서 눈물을 흘린게 아니라 일이 너무 많고 직장생활이 힘들어서 겨우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다 그때 무리해서 결혼을 안 했다면 바쁘고 힘들어서 내 인생에 기혼이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고독사 하지 않게 옆에 있어줘서 고맙다.
그래도 비교적 무던한 남편이라 내가 일에 미쳐 살건, 뭘 공부하건 전혀 신경 안 쓰고 혼자 잘 노는 편이니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보다 평화로운 가정일 뿐이다. 집이라도 평안하여 얼마나 다행인가~
집 밖은 전쟁터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매일 아침 전투하러 가는 느낌. 그리고 꼭 해내고 말겠다는 결의!
그래서 오늘도 아주 잘 쉬어야 한다. 몸이 피곤할수록 마음이 약해지고 회사에서 더욱 괴롭다. 그리고 피곤해서 실수라도 하면 스스로 자괴감이 엄청나다.
그냥 잘 쉬고 다음날 일 잘 해내고.
이것이 내가 원하는 단순하면서 유지하고자 하는 삶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