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에게 재능기부는 개인의 인성적인 선택이 아니다.>
무형의 것에도 응당 금전적인 가치가 들어있습니다.
이상하게 한국에는 재화가 아닌 것은 공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아요.
유형의 물건이 아닌 생소한 서비스여도 당신이 무형의 어떤 기술과 서비스를 이용한다면 돈을 지급해야 합니다.
2천년 초반, 한창 음악 파일 mp3가 유료화로 전환되던 시절 소비자의 반발이 꽤 많았습니다. 음악은 당연 공짜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죠. 지금이야 다들 유료 콘텐츠에 대한 의식이 높아졌지만 그 시절 영화, 음악 같은 무형의 컨텐츠는 무료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심지어 지금도 일부 의식 없는 디자이너는 서체나 프로그램을 공짜라는 명목하에 불법 다운로드로 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설마 그런 무개념이 있을까 싶지만, 아직도 있고 최근에도 그런 디자이너를 만나서 적잖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무형이 공짜라는 인식은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일부 디자이너조차 그러고 있으니까요.
특히 제가 종사하는 디자인 업계를 대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의식이 더욱 강하게 남아있죠. 별거 아니니 공짜작업을 청탁하는 경우, 작업하는 김에 하나 더 해달라는 요청 또는 수십 번 수정하는 관행.
이 모든 것은 디자인이 실재하는 유형 재화가 아니다 보니 "니가(=디자이너가) 조금만 더 수고로우면 공짜로 무한대 양산이 가능하잖아."라는 갑의 마인드 때문에 근절되지 않고 있습니다.
본인에게 없는, 생소하지만 특별한 능력이 필요한 무형의 서비스에 응당한 비용가치를 지불한다는 것에 굉장히 인색합니다. 노동과 지식, 그에 따른 시간도 다 돈인데 말입니다.
비용에 대한 기준은 상대편이 얼마나 손쉽게 해낼 수 있는지에 대한 지레짐작으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당신이 그 명함 만드는데 30분도 안 걸리니까, 그 가치는 거의 공짜나 다름없다."(....?) 이 무슨 논린가요? 내가 이 작업이 쉬운데 왜 당신이 그 노동의 가치를 후려칩니까?
의뢰하는 자신이 30분 만에 할 수 없는 일을 전문가가 30분 만에 해낸다고 그 가치를 평가절하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직접 배워 하시든지요??
이것을 30분 만에 해내는 기술과 감각을 키우기 위해 학창 시절에는 미술학원을 다니고, 미대입시를 치고, 대학교에서 들어가 많은 과정들을 공부하고 디자인을 배우고(이 과정에서 돈 많이 들음), 사회 나와서 실무 능력을 키워오며 수년간의 인생을 투자해서 만들어진 프로페셔널이 왜 당신의 잣대로 무료 봉사가 되어야 하나요?
심지어 어떤 사람은 포토샵 프로그램을 열기만 해도 디자인 결과물이 출력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거짓말 같지만 뭔가 입력값 코드를 넣으면 디자인이 자동으로 완성 & 출력되는 걸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더군요.(요새 Ai 기술이 발전되어 말이 안 되는 기술은 아니긴 합니다만 이 기술이 상용화된 걸 아직 본 적은 없습니다.)
프로그램을 쓸 줄 아는 건 기술이 맞지만 그 기술로 디자인을 만들어 내는 것은 경험과 창의를 바탕으로 한 재능이며 감각의 영역입니다. 프로그램을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 누구나 디자인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오해입니다.
따라서 당신이 오늘 당장 어도비 프로그램(포토샵, 일러스트레이션 등)의 기능을 마스터해도 디자인 개발을 하나도 못할 수 있다는 것이 팩트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어떤 일을 굉장히 쉽게 해낸다면, 그 일이 상당히 쉬운 일이라서가 아니라 얼마나 오랜 세월 그 분야에 종사하며 숙련되어 왔는가를 헤아리는 존경심을 가져보면 좋겠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쉬운 일도 자신이 실제로 해보면 여러 가지 예기치 못한 변수를 컨트롤하며 원만하게 진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것을 단순히 아는 것과 직접 해보는 것은 다릅니다.
몸소 해봄으로써 눈으로만 판단하며 얼마나 많은 가치를 속단했는지 깨달을 수가 있는 거죠.
당신도 10년 정도 투자해서 30분 만에 디자인을 만드는 전문가가 되어보세요~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만 말을 아끼죠.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오만으로 보일 수도 있기에.
타인이 쉽게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본인이 하기에 쉽지 않은 것을 기준으로 업무의 경중을 판단해야 하는 문제 아닐까요? 자신이 할 수 없기 때문에 전문가를 찾아왔을 테니, 그 서비스에 대한 정당한 지불을 하고 그 노동과 기술의 가치를 인정해야 합니다.
타인이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투자한 세월과 시간을 무시하고 본인 판단에 쉬울 것으로 단정 지어 그 가치를 책정하여 싸게 전문가의 기술을 후려칠 때, 제 마음도 후려침 당했습니다. 심지어 비용 깎기 정도가 아니라 대다수 공짜로 편승하려고도 합니다.
제가 디자이너라고 하면 주변에서 인기가 많습니다. (모르는 전화가 상당히 많이 옵니다.)
쉽게 말해 공짜로 제 능력을 착취하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온갖 이름도 모를 사람들은 사돈의 팔촌부터 본적도 없는 쌩판 남의 친구의 아버지의 옆집 아들의 여친까지 무료로 수많은 디자인을 해다 바쳐야 했습니다. 우정의 차원에서 해주는 디자인이 별거냐며 나도 크게 개의치 않았죠.
그들에겐 어려워도 나에겐 크게 어려울 것도 없는 일들이라서 스스로 제 가치를 가볍게 여겼습니다. 야근 후 단 10분의 휴식도 아까웠을 때에도 남들을 위해 무료로 디자인을 개발했습니다.
정작 그들은 게으르게 공짜 서비스를 누리며 술 마시고 놀러 다녔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없는 시간 쪼개어 퇴근 후 30분 혹은 몇 시간씩 투자해 남들에게 거저로 디자인을 해드렸습니다. 단순히 이 일을 사랑하고 열정을 갖고 있기에 그 성실을 이용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무 료 로 혹은 거의 무 료 로.
이것은 정말 큰 실수였고 나의 경솔함이었다 생각합니다. (지금은 절대 그렇게 안 합니다.)
이런 행동이 반복되면 그 전문분야는 지속가능한 성장을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디자인은 건너 건너 지인만 통하면 대충 공짜로 얻을 수 있는 별것 아닌 것으로 간단하고 하찮은 기술력으로 치부하게 합니다.
제작자 입장인 저 역시도 무료로 피곤을 쫓으며 하다 보니 퀄리티를 고민하기보다 그냥 욕 안 먹을 정도로 대충 해주는 식으로 처리할 때가 많았습니다. 후진 디자인의 양산이 이 업계에 치명적인 과실이 된다는 것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무료와 저질 디자인의 콜라보였던 과거가 부끄럽습니다.
그런 관계는 심지어 소중하지도 않고 먹튀처럼 인연은 서서히 멀어져 갑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은 저의 가치를 이용하고 사라졌습니다. 신기하게 정말 소중한 인연들은 모두 비용을 지급하려고 했습니다.
저도 소중한 협력사에는 돈을 아끼지 않고 리젝트 비용까지 모두 제대로 지급합니다. 오래 함께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싸고 저급으로 쉽게 이용할 수는 있지만 불만족스러운 방향이 만연되면 그 분야의 가치는 점점 없어지다 힘을 잃고 사장되어 갑니다.
그때 돼서 아무리 정당한 금액 아니면 고액의 돈을 제안해도 당신의 눈높이와 고급스러운 입맛에 맞는 양질의 서비스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미 자본주의 시장 경쟁에 치여 고급 서비스는 사장되었고, 싸고 소모적으로만 유통되는 저급 분야가 되어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무엇이든 지속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결국에는 자본이 통해야 합니다.
한 분야를 꾸준히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프로페셔널한 사람이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계산적인 인간이라고 느껴서 혼자 고민할 필요조차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먹고살기 위해서도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분야 사람들은 고민도 안 합니다.(제발 디자이너들이여~ 금전 감각을 키우세요! 봉사활동이 아닙니다. 봉사를 원한다면 사단법인이나 비영리 단체에 재능 기부를 할 곳은 많습니다.)
나의 작은 호의는 이 분야의 성장을 조금씩 갉아먹을지도 모르니 늘 신중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나의 능력과 노력을 착취해야만 상대편이 더 큰 이윤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은 큰 오해입니다. 이 정도 디자인 서비스에 돈을 융통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어떤 비즈니스를 하기에 아직 준비가 안된 사람입니다.
이런 시행착오의 시기를 겪고 지금에 와서 내가 만약 무일푼으로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은 상대편이 무료로 어떤 공익적인 프로젝트를 추진한다는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 속에서 나도 기꺼이 봉사하는 마음으로 내 재능을 무료로 기부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몇 해 전 국내 동물권행동협회 카라에서 1년간 디자인으로 재능기부를 하며 많은 동물들의 실태를 알리는 것에 동참했습니다. 그간의 과오를 씻어내기 위한 노력 중 하나였습니다.
내 디자인은 스스로 무료로 평가절하하여 이 분야를 저급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것과 내 디자인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는 곳에 무료로 봉사하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재능기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기부여야 가능합니다.
누구 하나만, 어떤 한쪽만(주로 디자이너만) 불균형하게 무료로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덕에 누군가는 어떤 이득을 획득한다면 정당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가진 자는 더 가지고 없는 자는 더 가난해집니다. 저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이 분야에 종사하는 후배들과 동료들을 생각하면 그래서는 안 됐던 겁니다.
저는 딱히 그 돈이 필요 없어서 돈을 안 받았지만 이건 오만이었습니다. 내가 좋은 마음에서 제공했던 무료 서비스로써 내가 사랑하는 이 분야는 점점 저가, 염가의 틈새에서 결국은 싸고 빠르고 적당한 퀄리티로 대량생산되는 일회용처럼, 하찮게 소비되는 위치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이 업계 후배들은 일을 하고 제대로 보상을 못 받게 되는 악순환을 양성할지도 모르죠. 그들은 먹고살기 위해 저가와 저급으로 디자인을 공장식으로 돌릴 수도 있습니다.
그들도 무료 혹은 열정페이로 해야 하는 일이므로 퀄리티나 컨셉을 날카롭게 담을 수가 없습니다. 클라이언트가 사업할 수 있게 빠르게 대충 아무거나 해주는 정도로 이 일을 가볍게 쳐내게 됩니다.
누군가의 성공을 위해 왜 디자이너는 무료로 봉사해줘야 하는 것인가?
누군가는 왜 디자인은 공짜라고 생각하는가?
과거에는 무료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이제 서서히 우리가 그 인식을 바꿔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무료로 얻고자 하는 것은 본인이 몸소 해내는 것 외엔 답이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서비스(가치)에 돈을 지불하는 것은 당연하며 이걸 무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말로 시대착오적이며 타 분야에 대한 리스펙이 없는 무례한 인간일 뿐입니다.
비용 얘기로 관계가 끊어져야 한다면 그냥 그 연결은 끊어지게 두는 게 낫습니다.
보이지 않는 서비스여도 그 가치를 이용한다면 당연히 정당한 지불이 있어야 합니다. 그 분야가 생소하고 별것 아닌 것으로 보여도 공짜라는 판단을 외부에서 눈으로만 보는 사람이 결정하는 모습은 경솔함을 여지없이 드러낼 뿐입니다.
무형의 기능과 능력에도 당연히 비용은 있습니다.
그 능력은 당신의 것이 아니므로 "별거 아닌데 대충 좀 해줘 봐."라는 말은 디자이너에게 물리적인 폭력이자 해당 분야에 대한 존중과 이해가 없는 무식한 발언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 크몽이라는 서비스로 인하여 디자인 업계가 얼마나 저급화 되었나요?
누구는 그것을 예찬했지만, 업계 전문가들은 그 서비스를 보며 마음 아파하고 절망을 느끼고 있습니다.(교육계 몸 담고 있는 교수들은 이 서비스를 보며 한탄하고 있습니다. 우리 학생들과 후배들의 미래가 암담합니다.)
사용자들은 드디어 디자인에 거품이 빠졌다며 기뻐했습니다. 원래 디자인 따위야 쉽고 가벼운 것이었다고.
언발에 오줌누기처럼 이 시스템이 지속될 때 당장은 저가로 빠르게 소비되는 디자인이 편리하고 좋아 보이겠지만, 결국은 그 불행의 화는 우리에게 돌아오게 되어있습니다.
제작자로서는 해당 필드의 추락이, 소비자로서는 저급한 디자인이 만연되는 사회를.
이곳에서는 로고가 5만 원, 10만 원에 쉽고 싸게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찍어내듯 알맹이 없는 디자인은 결국 이 디자인 업계의 지속적이고 깊이 있는 발전을 가로막게 됩니다. 크몽엔 10만 원인데 너는 왜 500만 원이냐? (어떤 부분이 다른지 설명하기에 지면이 너무 짧습니다. 그 설명은 아래 아래 아래 *하루키씨의 글로 대신합니다.)
결국은 우리 디자인 업계 전체를 저급하게 하고 이 분야의 지속 가능한 미래 성장을 어렵게 합니다. 그렇게 한국의 디자인 퀄리티는 별로라고 하면서 자꾸 해외에서 디자인을 찾게 되고, 국내 디자인 업계는 더욱 침체될 수밖에 없는 악순환을 반복합니다. 제대로 만들려면 시간이 들고, 비용이 듭니다. 편법은 없습니다.
대충 싸게 비용 없이 열정페이 정도나 무일푼으로 어떤 분야를 대한다는 것은 모두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이용할 가능성을 점점 희박하게 만들며, 장기적으로는 해당 분야의 주체적 성장을 힘들게 합니다.
서서히 질이 하락하며 하급 서비스로만 자생하게 될 뿐이죠. 좋은 디자인이 넘치는 시대가 아닌 눈 버렸다는 심정으로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국내 디자인에서는 해답을 찾을수 없게 될수도 있죠.
그렇게 좋은 디자인은 더 큰 비용을 감수하고 해외에서 찾겠다는 공식이 해결책이 되어 점점 국내 디자인은 질이 낮아지고 해외디자인 페이는 올라갑니다. 부익부빈익빈의 양극화는 더욱 심해지겠죠. 국내 디자이너에게는 개발해 볼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맙니다.(이미 건축업계 등 많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같은 일들은 일본 문단에도 있었습니다.
아래 무라카미 하루키씨의 자조적인 이야기를 읽으며 자본주의 시장에서 창작자에게 싸게 후려치는 관행은 그 분야를 파멸로 이끌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었습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계산하자는 경향이 일본 문단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들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이다. 문학이든 재즈카페든 근본은 마찬가지다."
[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무라카미 하루키]
일본에서도 작가들에게 돈을 제대로 안 주고 작품을 뽑아내도록 열정을 강요하나 봅니다. 무라카미씨는 절대로 무료 청탁을 받지 않는 것으로 문단을 지키고자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