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인미D Aug 14. 2023

11.디자인 시안이 망하는 과정

<디자인은 인기투표가 아니다.>


 좋은 디자인 시안을 결정하는 방법은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방법이 정답이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적어도 시안의 결정 방법이 인기투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회사에서 시안 결정 방법은 생각보다 전략적이지 않습니다.

 시안의 결정은 투표와 결정권자 취향 맞추기가 많거든요.(시장의 동향과 소비자 취향은 크게 중요치 않을 수도 있음.)

 시안 선정 투표를 거칠 때 드는 생각은 대학교 레포트를 제출하면 교수님이 비행기로 접어 하나씩 던진 다음 가장 멀리 떨어진 종이부터 F로 매겨 가까운 것을 A로 준다는 우스갯소리가 생각합니다. 멀리 날아간 종이는 비어서 가볍고 가까이 떨어진 종이는 무거워서 A라는 거죠. 이런 농담 같은 학교의 전설이 직장에 와서 비슷한 현실이 될 줄이야. 


 투표를 할 때 사람들은 별뜻이 없는 경우도 많기에 불특정 다수의 의견이 진실과 정확도가 떨어지기도 합니다. 시안에 많은 사람의 의견을 모조리 반영하는 것도 결과적으로 보면 누구도 원하는 방향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회사에서 디자인 결정은 인기투표를 꽤 많이 합니다. 

 예전에는 시안 3~4가지를 보드에 부착해 전 직원 대상으로 스티커 붙이기로 투표를 진행했습니다. 한 명 한 명 고충상담 하듯이 온갖 소원을 다 들어 인기투표 결과를 가지고 최종 보고를 갑니다. 

 투표 결과 최종 결정권자가 본인의 생각과 다르면 모든 시안을 다 뒤엎어 버립니다. 아~ 투표가 무의미해지는 순간이기는 합니다. 어쩌면 다행일까요. 


 전략적인 디자인은 그것을 기획하는 해당 담당자들의 책임아래 목표를 설정하고 차별화하는 방향으로 만들어 최종까지 이끌어내는 과정입니다. 

 시안을 펼쳐놓고 목표와 방향을 모르는 수많은 불특정 다수의 취향을 담아 칼로 난도질하는 과정이 필요한가라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그렇다고 객관적인 필터링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전략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미지만 보고 취향이나 그날 기분대로 선택하기도 합니다.


 극단적인 경우는 이런 사례도 있었습니다. 그날따라 영업이 힘들었던 직원은 때마침 디자인 인기투표를 하러 온 디자이너에게 화를 냅니다. "이 따위 백날 해봐야 매출이 오를 거 같아? 난 제일 별로인 디자인이 선택되어도 상관없다."라며 제일 안될 것 같은 더미시안(디자인 시안들에는 끼워넣기 시안이 꼭 들어갑니다.)에 투표를 합니다. 같은 팀원들도 제일 별로인 시안에 동참하며 망한 시안이 결정이 되기도 합니다. 

 

 행동경제학에 따르면 사람은 객관적으로 모든 상황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결정은 오류투성이에 감정적입니다. 이렇게 전통경제학에 한계가 있어 행동 경제학이라는 학문까지 생길 정도입니다.

 투표를 하자는 것은 사람이 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는 관점의 오류입니다. 우리가 물건을 살 때 무조건 합리적으로만 결정하지 않습니다. 전혀 필요치 않은 것이라도 나를 행복하게 한다는 이유로 충동구매도 하죠.


 하지만 기획과 디자인을 하는 주체자들은 최대한 본인의 주관성을 배제하여 객관화된 데이터로 접근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전략의 액기스만 담아 디자인을 만들어내도 시장에서 USP(고객에게 소구 하는 유니크 셀링 포인트)는 스쳐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의견과 취향(직장상사)이나, 전략과 상관없는 다수결(전 직원)로 수정 방향이 결정되는 것은 평범함으로 물타기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물타기를 거치면 아무리 뾰족한 전략을 가진 디자인도 둥글둥글 특징 없는 디자인이 되기도 합니다.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 결과를 내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렇게 수많은 내용을 담은 안전하고 보편적인 방향이야 말로 안전하거나 보편적이지도 않게 한마디로 감 떨어지는 결과로 이끌어가게 됩니다. 


 가장 뾰족한 전략은 기획자와 개발자의 전문성을 믿고, 시장에 출시했을 때 오히려 통할 때가 있습니다.

인기투표 결과 선정된 시안에 결정권자들의 노랑이 좋아 파랑은 싫어, 나 노안이야 글자 크게, 그림 싫어 사진 작게, A+b+C 시안 모두 합쳐내 등의 사적인 취향을 반영해 드리며 수정하다 보면, 전략이고 뭐고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그저 윗분의 취향저격 혹은 기분 맞춰드리기 정도 될까요? 

 사실 회사에서는 이렇게 단 한 분을 위한 취저 디자인이 완성되기도 합니다. 이해합니다.


 그런 시안에 차별성 있는 시장성이나 전략을 날카롭게 담기는 쉽지 않습니다. 

 물론 모든 시안이 이런 식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인기투표와 결정권자 취향 보태기로 마무리되는 점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그렇기에 기업이라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보편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기는 합니다. 그런 시스템을 이해하면 서로 납득이 되는데, 이 와중에 또 회사에서 혁신을 하라고 하면 골치가 아파집니다. 


 보편타당한 개인 취향 반영하기(안전) vs. 독보적인 스타일 되기(혁신)은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창과 방패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상당히 혁신적인 디자인 시안을 제시했던 프로젝트가 있었습니다. 상사가 디자인 기획을 들을 때까지는 좋다고 하셨지만, 시안을 보고 한 말씀하십니다.

 "이 디자인은 기업 디자인이 아니다. 에이전시에서 나 특이하게 디자인 잘한다고 자랑하려고 만든 디자인 같다. 나 이 정도 실력 있다고 자랑하는 거냐?"

 혁신적인 시안이 나와도 그것을 선택할 안목과 결정력이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50대 결정권자 아재 취향에 맞춰 가지 치기와 시안 섞기, 보편성으로 물타기를 완성하여 가장 매력 없이 수정되면 출시가 됩니다.


 시장에서 제품을 선택하는 소비자가 일반인이라는 이유가 전 직원 투표를 해야 하는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일반일을 대상으로 한다고 해서 그들이 생각하는 보편성을 디자인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바는 많은 사람들의 취향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전략과 고객의 셀링포인트를 매칭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장에서 씽크가 맞다는 것입니다.

 결정 과정에서 일반인들의 의견을 참고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전적인 방향으로 귀결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수결의 오류.

 모두를 만족시키는 평균을 찾다 보니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수결이 선택하는 시안에서 결정권자의 취향이 버무려지고 나면 처음의 의도와 전혀 다른 결과가 탄생하기도 합니다. 

'이 디자인 이번에도 산으로 갔다. 다음에는 진짜 제대로 해봐야지.' 결심을 하고 해당 프로젝트는 끝납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리뉴얼 소식이 들려옵니다. 

조금 더 전략적인 디자인으로 리뉴얼하라. 



 그렇게 오늘도 '가장 좋은 시안이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적합한 시안이 선택되는 것이다'.라는 명제는 진리로구나 깨닫는 하루입니다.


 디자인은 마치 정치와 같아서 좋은 디자인보다는 모든 사람의 합의 과정을 담은 시안이 중요한 것입니다. 

 논리야 놀자 시리즈에 나온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장 예쁜 부위만 모아 놓은 얼굴은 가장 아름다운 미인이 아니라 비율이 안 맞는 추녀가 된다는 교훈적인 일화입니다.


 그렇기에 도대체 기업에서 왜 저런 디자인을 출시했을까 어이가 없을 때는, 사실 그 뒤에 수많은 사람들의 열망이 있었다는 것을 이해해 주세요.

 가장 좋은 것만 모아놓다 보니 어쩌면 가장 이상한 결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아마 디자이너도 그런 디자인을 하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의사결정이 단순할수록 좋은 디자인이 최종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혁신을 하기가 쉽지가 않고, 중간중간 수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넣다 보면 이상한 결과까지 이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윗분의 의견을 거스를 수 없고 무조건 그것을 갈아내어 끼워 넣어야 하다 보니 결과가 좀 이상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실무자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결과이기에 내 얼굴에 먹칠을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 어려운 조건에서도 너무 이상하게는 마무리 짓지 않으려는 담당 디자이너와 마케터의 고군분투가 숨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름 노력했습니다.

 모두의 아이러니한 의견을 반영하면서도 너무 이상해 지지 않기란 사실 혁신보다 어렵습니다.  

 

 이런 다양한 상황 속에서도 은근 결과가 잘 나오는 디자인이 있습니다.(얻어 걸린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최종결정권자와 바이어의 의견이 동일해지고 우연히 추가한 의견이 시너지를 발휘하여 시안이 조금 더 탄탄하게 마무리됩니다.

 이런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됩니다.

 디자이너도 마케터도 자신 있게 내가 개발했다고 웃으며 말할 수 있는 희귀한 제품이 됩니다. 

 우연과 우연, 행운과 행운이 겹쳐 잘 어우러지는 이 하나의 성공을 보람으로 수많은 칼날을 버텨내고 있습니다. 



뒷이야기>>>

 오늘도 여기저기서 피드백(크리틱)이 날라와 디자인 시안에 꽂힙니다. 

 너무 얼토당토않은 의견이 마구 쏟아질 때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경쟁사에서 우리 말아먹게 하려고 스파이를 파견한 게 아닌가.' 하는.

 디자인은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습니다. 디자인에 대한 여러 의견이 생긴다는 것을 나에 대한 공격이 아닌 적합한 방향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며 상처를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디자인은 원래 크리틱과 디벨롭으로 만들어지는 친구니까요)


 그런데 시간이 너무 없어서 당황스럽습니다. 지금 시안을 처음부터 다시 수정하려면 당장 내일 촬영은 취소되어야 합니다. 시안의 방향에 따라 촬영 PPM을 다시 써야 합니다. 이전 시안대로 촬영을 진행하면 새로운 디자인에 전혀 적용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촬영 일정은 미루지 않고 진행하도록 지시합니다. 누가?(보이지 않는 손이)

 이전 촬영으로 새로운 시안을 끼워 맞춘다는 것이 한계가 있습니다. 어색하기도 하고 조화가 안 맞습니다. 

 이번 시안도 망했네요.

 저도 잘하고 싶었는데 이것저것 억지로 주어진 환경에 시안을 맞춰버려야 합니다. 망한 시안이라고 생각하는데 출시 후 시장에서 아주 잘 팔리기도 합니다. 잘 만든 제품인데 망할 때도 많습니다.

 무슨 아이러니인지 모르겠네요. 알 수가 없습니다.


 지적이 많아져서 디자인에 모든 것을 반영하다 보면 시안이 괴물이 되기도 합니다.

 디자인은 조금 더 적은 사람의 의사 결정이 필요한 것 같기는 합니다. 

 성형을 해나갈수록 무너지고 추해지는 성형 중독쟁이 같은 결과물이 남아있을 뿐, 내 디자인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가장 예쁠 때 멈췄어야 했는데......

 이번 작업도 내 포트폴리오에서는 빼야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