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들이 처 게을러서 내가 또 밤새야 하네?>
디자이너에게 밤샘, 야근은 불가피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기에 이 일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이 일을 하며 가장 곤욕스러운 시간은 윗분의 피드백을 대기 타며 기대릴 때입니다.(제발 지령을 내려주십셔.)
디자이너와 소방관의 공통점은, 주요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는 언제 지시가 떨어질지 몰라 항시 휴일도 출근을 대기해야 한다는 점. (퇴근하다 회사로 돌아가기, 퇴근하려고 옷 입고 엘베 쪽 걸어다가 불려 가서 다시 자리 앉기, 나머진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 안 하겠음)
최근에 맡은 중요한 프로젝트 오픈을 앞두고 임원분이 진행결정을 해주지 않아 주말 출근을 앞두고 대기를 합니다. 그 결정이 떨어져야 출근해서 디자인 작업을 하고 출력을 무사히 맡겨 오픈을 할 수 있으니까요.
이제 나에게 남은 매장 오픈은 36시간도 채 남지 않았지만, 임원분께서 피드백을 미루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결정이 이루어지면 얼른 회사로 달려가겠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대기하는 시간은 저를 미치게 합니다.
지난밤, 밤새 어떤 피드백이 올지 몰라 e메일을 30분 단위로 새로고침 하며 이미 밤을 새웠습니다. 누워있어도 잠이 들지는 못했죠. 그러나 밤새 어떤 회신도 오지 않았고 이제 오픈 36시간을 앞두고, 어떻게 할 것인가 정신이 나가버리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이 모든 것이 안 됐을 때 해야 할 플랜 A~C를 다시 짜고 있는 내가 싫기도 합니다.
밤새며 일하는 것보다 밤새며 어제나 저 제나 기다리며 대기하는 것이 더 괴롭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지금까지 부인해왔던 진실 '설마 난 정말 본질적으로 일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를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남들이 저보고 일에 미쳐서, 일이 좋아서 이런다고 할 때마다 정색하며,
"난 일이 좋아서가 아니라 남에게 피해가 안 가도록 모두 다 잘 해내고자 하는 책임감."이라고 정정했거든요.
그런데 어젯밤 천국과 지옥을 밤새 오가며 난 일을 어쩌면 무지무지 좋아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을 소처럼 하는 시간보다 하염없이 불안에 떨며 어떤 결정이 될지 기다리며 다음 액션을 준비하지 못할 때가 너무나 괴로운 걸 느끼며 제발 뭐라도 그냥 시켜달라며 몸부림을 칩니다. 팀장님께 회사 가서 다른 일 하며 대기하겠다고 했으나, 제발 워워 진정하라며 이거 말고 장기 프로젝트도 많으니 완급 조절 좀 하라셔서 어쩔 수 없이 강제로 반나절을 대기로 보내게 됩니다.
(뭔가 미루고 안 하는 사람들은 진짜 대단합니다. 그 멘탈 존경을 표하고 싶음.)
아 그런데, 임원 분의 '다음에 피드백 주겠다...'라는 회신. 다음은 없어요. 하루 반 뒤에 신규 매장이 그랜드 오픈이니까요. 다음은...언제일까요? (살려줘)
같은 일이 작년에도 있었네요. 분식 팝업스토어 오픈 3일 앞두고, 임원 결정을 기다리다 뒤늦은 새로운 의견에 매장 한쪽 벽면그래픽을 완전 다른 시안으로 개발해야 했습니다.
갑자기 주말 밤에 일을 줄 협력사도 없고, 혼자서 뒤늦게 수습하면서 꼬박 밤새게 되었습니다. 그 상태로 쉬지도 못하고 토요일 저녁에 청담에 푸드 추가 촬영을 가다가 지하철 플랫폼에서 놀러 가는 회사 동료를 만났습니다. 같은 월급 받고 다니는 회사인데 저분은 행복하시네?라고 잠시 생각하며, 다시 정신을 차립니다.
나만 목 빠지게 기다리는 촬영스태프들을 만나 무사히 촬영 후 집에 돌아와 그대로 다시 침대에 들어간 해피엔딩은 없었어요. 촬영하던 그 사이에 온 임원의 피드백에 따라 디자인 수정을 진행하며 그날 하루 밤샘을 더 한 뒤 새벽쯤 디자인 시안을 보내고 나서, 잠시 기절했다가 아침 일찍 팀장님 피드백에 따라 또 수정하여 무사히 디자인 데이터를 출고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오픈 전 무사히 제작물을 현장에 비치한 뒤 오픈 파티 전에 나와서 혼자 이른 아침의 성수동을 걷는데 눈물이 났습니다.
해냈다는 안도의 눈물과 힘들다는 비관.
자기 연민에 특별히 빠지는 스타일은 아닌데 이렇게 새로운 브랜드 매장을 오픈하고 나면 반쯤 미쳐있어서 갑자기 스스로가 가엽고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괴로운 일이 생기면 감정에 메몰 되기보다 해결방법을 고민하는 극 T형 인간이지만, 이렇게 한 달 가까이 탈탈탈 털리면 아무리 로봇 인간도 F가 됩니다.
'불쌍한 나, 가여운 나, 힘든 나, 아무도 이해못해.' 혼자 중얼중얼 거리게 되죠.
디자이너가 꽤 멋져 보이는 직업 같고, 대기업을 다니니 잘 나가 보이겠지만, 사실 너무 거지 같고 불성실한 동료들 때문에 디자인으로 모든 것을 커버치고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자기 연민에 빠집니다. 프로젝트가 끝날 때마다, 이 일은 더 이상 못하겠다고 하면서도 90%의 잉여동료가 아닌 나와 함께 울며 달리는 10%의 동료를 생각하며 또 참아내고 해내고 있습니다.
무슨 디자이너가 사람의 생명을 구해야 하는 급박하기만 한 일도 아니고, 엄청나게 대의적인 일을 하는 투사도 아니면서 이렇게 사생결단으로 살아갈 일인가 싶지만, 이게 내가 살아가는 방식인 건가 싶기도 합니다.
이번에도 어떻게든 피를 뽑고 뼈를 깎아 해내겠지만, 이것을 해내기 위해 정신적으로 몹시 지치고 자존감이 너무 떨어져서 극복을 위한 명품 쇼핑을 할 것 같습니다. 이래저래 힘들어서 쇼핑하고, 번 돈 보다 쇼핑으로 나가는 돈이 커서, 회사 동료들은 그럴 거면 회사 나와서 돈 안 벌고 ㅆㅂ비용 아끼는 게 이익이 아니냐라고 하기도 합니다.
맞는 말 같긴 한데, 본질적으로 일을 좋아하는 것을 깨달아버린 이상, 미쳐 날뛰는 경주마처럼 멈추기가 쉽지 않네요. 남들이 "넌 니가 일을 좋아해서 그런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라고 할 때마다 몹시 화가 났는데, 어쩌면 나의 불도저 라이프 스타일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더 안심하고 게을러지게 만드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멈추고 미루고 게으른 게 적성에 안 맞는 걸?
무엇을 미루기 위해 드는 정신적 에너지는 그 일을 해내기 위해 쓰는 정신력보다 많이 드는 것을 알기에..
ps. 너는 왜 맨날 바쁘냐(바쁜 척하냐)라는 친구들에게 내 상황을 아주 간단히 해명하기 위해 쓴 글. 친구도 거의 없긴 하지만. 이렇게 살다보면 있는 친구도 모두 사라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