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인미D Jan 25. 2024

66.화목의 비결은 화낼 힘도 없어서

<직장생활이 힘들어 그런지 반대급부로 가정이 행복하게 느껴지네?>


직장 생활을 힘들게 하고 있기 때문에 얻은 뜻밖의 이득, 행복한 가정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행복한 가정으로 착각에 가까운 느낌으로 살게 된다.

서로 바빠서 잔잔한데 신경 쓸 감정의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온갖 사람들을 다 만나고 별일을 다 겪다 보니 집에서 마주하는 일들은 모두 상식적이며 행복하게만 보인다. 웬만한 가정 일들은 직장에서 마주하는 일들보다 이해가능하고 내 통제 범주에 있다.

내가 차분히 마음먹고, 몸을 조금만 더 움직이면 모든 것을 컨트롤할 수 있다. 이 집안에 관련된 일들은.


 회사 업무에 엄청나게 몰입하여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고 집에 오면 장렬히 전사한다. 남편이 무슨 난리를 쳐도 나는 흐뭇하기만 하다. 회사에서 무례하고 개념 없이 행동하는 동료들에 비하면 저 남자는 참~ 귀엽다.

철딱서니 없고 생활력이 없을 뿐이지 악의가 없다. 그저 본능대로 살고 있는 존재일 뿐.

이 반려인은 내 말을 듣지 않지만, 괜찮다. 

내 말을 안 듣는 건 반려냥 고양이들도 마찬가지다. 악의 없이 본능대로 그저 존재로써 충분히 귀엽게 살고 있는 남편과 고양이다.


 신혼 때는 나도 쿠킹클래스를 다니기도 하고 집에서 요리를 약간 했다. 하지만 내 남편은 집밥을 싫어한다. 라면과 과자를 좋아하고 배달음식을 사랑한다. 

지금이야 뭐 이런 유니콘 같은 남편이 있냐 싶지만(다들 부러워한다), 나도 새댁일 때는 집에서 남편과 알콩달콩 저녁을 해 먹고 싶었다.(정신이 나갔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내가 만든 한식 요리를 즐기지 않는 것을 보고 점점 요리를 내려놨다. 나도 한식은 별로 안 좋아한다. 이탈리안 음식이 좋다.


 처음에는 내가 차려준 음식을 안 먹고 라면 물을 올리는 모습에 서운하기도 했지만 지금이야 어찌 이런 고마운 남자가 나랑 살고 있나 싶다.

삼시세끼 밥을 해다 바치라는 남자와 살았다면 내 삶이 얼마나 고달팠을까?

바빠서 내 밥도 못 챙겨 먹는 마당에 밥을 챙겨야 하는 남편이 있다면 퇴근 후 집에 오는 것조차 2차 출근하는 마음으로 괴로움이 되었을 것이다. 

주말에도 알아서 라면과 과자를 챙겨 먹고 배달음식으로 끼니를 때운다. 나에게 주부로써 해야 하는 어떤 바램도 없다. 그냥 그는 본능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형태로 살고 있을 뿐이며 그걸 만족해하고 있다. 고맙다.


 회사에서 모든 감정적이고 이성적인 에너지를 소진하고 집에 도착한다. 남편을 만나면 힘든 직장생활이 고맙기까지 하다. 어떤 상태의 남편이건 회사에서 겪는 일들보다 이미 훌륭하다. 

무슨 상황을 직면하든 간에 에너지 바닥상태에서는 집에 도착하는 것만으로도 기쁘다. 오~홈 스윗 홈.

카우치 포테이토처럼 게으르게 누운 남편은 평화롭고 목가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더러운 내 집은 아주 cosy하고 인간미가 철철 넘친다. 고양이가 토해놓은 러그를 보면 생명력이 느껴진다. 

아~이 집 나 혼자가 아니구나. 


 남편이 혼자 끓여 먹은 라면그릇을 설거지 해놓으라고 한지 며칠이 지났지만 그대로 쌓여있다. 

내가 화를 낼까? 아니다. 나는 화를 낼 힘이 없다. 

집에서는 좋은 마음만 먹고 싶다. 웃는 건 화내는 것보다 에너지가 덜 든다. 아니 오히려 웃으며 상황을 인지하면 에너지가 충전이 되기도 한다. 

이미 회사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며 모든 에너지를 다 쏟고 왔으므로 힘이 없다. 

설거지할 그릇이 개수대에 잔뜩 쌓여있구만... 하하하. 인생의 낭만을 아는 놈. 카르페디엠~ 설거지는 주말에 하렴. 그깟 날파리~ 공존하지 뭐.


 바닥에는 먹고 남은 과자 봉투가 여기저기 굴러다닌다. 흐흐흐 좀 주워서 분리수거 봉투에 넣으면 좋겠구만 아주 부인을 잘 만나서 게으름이 늘어졌다 싶다. 얼마나 나를 믿고 있으면 쓰레기 분리수거를 해주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남편을 고쳐 써볼까 했지만 실패했다.(어쩐지 결혼할 때 시어머님이 굉장히 홀가분해 보였다. 고치기 실패하시고 나에게 떠넘긴 게 분명하다.)

아무튼 알아서 저녁을 챙겨 먹고 과자로 후식도 야무지게 챙겨 먹은 생활력 있는 남자. 야근하고 온 부인에게 과일 깎아오라고 안 하니 얼마나 호인인가?


 자려고 누운 침구에 과자 부스러기가 등에서 바사삭 깨진다. 화는 나지 않는다. 하하하~ 과자를 털어내고 얼른 눕는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지금부터 몇 시간을 잘 수 있느냐다. 자고 있는 남편을 깨워 화낼 시간이 없다. 나는 시간에 쫓기는 중이다. 꿈나라로 얼른 가야 한다. 지금 화를 낸다고 조금 전의 침대에 떨어진 과자가 박살이 난건 없던 일이 되지 않는다. 자 효율적으로 생각하면 지금은 털어내고 잘 때다.


 내겐 화낼 여유가 없다. 사실 이 모든 것들은 회사에서 겪는 말도 안 되는 일들에 비하면 일상을 웃기게 하는 아주 재밌는 시트콤 같은 순간일 뿐이다.

집에 들어온 순간 남편과 싸우고 화내라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 '인생의 살아있는 순간을 느끼게 하는 드라마적 장치'가 아닐까 생각한다. 남편과 고양이는 그저 귀엽다.


 만약 독신으로 살아서 이런 순간조차 없었다면 삶이 참 팍팍했을 거다. 퇴근 후 어이없는 집안의 모습을 보며 어처구니 없게 웃으며 기분을 전환할 기회가 없었을 거다. 회사의 분노만 가슴 가득 담은 채로 씩씩대며 세상을 원망하며 잠들고, 직장을 다니는 생활만 로봇처럼 반복했을지도 모른다.

일밖에 모르는 차가운 나에게 남편과 고양이는 인간미 있는 일상을 선물해 준다. 비록 집을 좀 어지르며 내 케어를 기다리며 생활력 제로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몹시 힘든 회사를 다니는 나와 살고 있는 남편은 화목한 가정에서 마음 편하고 즐겁게 살고 있다고 한다. 나는 바빠서 별달리 그에게 터치할 겨를이 없으므로 남편은 자유로운 인생을 즐기고 있다. 부인이 직장생활이 몹시 힘들면 가화만사성이 된다.

일에 열정이 있고 사회에서 승승장구하는 부인을 존경하길 바라며. 하하하.


 고양이와 남편은 그저 존재로써 고맙고 귀여운 나의 반려 생물들이다.

힘든 하루를 마치고 집에 와서 그들을 마주하면 나는 기쁘기만 하다. 고양이에게는 캔과 건사료를 주고 남편에게는 배달음식이나 과자를 사주면 아주 좋아한다.

나는 전생에 덕을 많이 쌓아서 그런지 남편 케어가 무척 쉬운 느긋한 가정을 꾸리며 살고 있다. 내 기대치에 맞추기를 바라지만 않으면 그저 알아서 잘 살아준다. 보통 남편은 이렇게 하더라는 기준은 전혀 필요 없다. 

이 남자는 보통 남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존재로써 고맙고 귀여운 나의 반려인 아닌가.


 집안일을 못하고 생활력이 좀 없어서 그렇지, 매사 긍정적이고 평화로운 존재다.

느긋하고 게으른 모습에 화가 날까? 아니다. 나는 그냥 흐뭇하다. 남편이 빈백에 누워 노란 체크무늬 잠옷을 입고 귀엽게 잠들어 있다. 옆에는 과자 봉투들이 나뒹굴고 있으며 설거지는 쌓여있다. 

나는 전혀 화가 나지 않는다. (예전엔 잠시 화가 났다. 빈백을 불태우고 싶기도 했음)

그의 잠든 모습은 마치 '킨포크 매거진'의 한 장면처럼 평온하고 인간미가 넘친다. 


 처음에는 장난으로 시작한 이런 감정 연습들이 지속되니 이제 정말로 삶이 웃기고 재밌어졌다. 허술한 남편과 엉망진창인 집이 참으로 따스하고 좋다. 이 감정이 진짜 삶이 되어버렸다.



 몇 달 전 남편이 독감에 걸려 골골대며 누워있었다. 감기약을 먹어야 했기에 죽이나 먹을 것을 좀 배달하려고 했더니 입 맛이 없어서 안 먹는다고 했다. 걱정이 되었지만 어찌할 수 없어서 인스턴트 죽이라도 사 왔지만 먹지 않았다.

대신 남편은 과자를 잔뜩 먹고 약을 먹었다. 음...내가 화가 났을까? 아니다. 뭐라도 먹고 약을 먹어서 빨리 나으렴~

결국 나에게 감기를 옮기고 말았다.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건강을 위해 엄청나게 관리하는 나에게 감기를 옮겨서 일도 생활도 엉망으로 만들다니. 오랜만에 걷어차고 싶었다. 

병에 걸려 골골대며 일에 집중 못하는 사람은 자기 관리를 못하며 프로페셔널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픈 것을 숨기기 위해 독감임에도 바들바들 떨며 회사에서 일하며 버텼다. 너무 힘들었다. 집에 가서 눕고만 싶었다. 퇴근하고 왔더니, 휴가 내고 집에서 자고 있는 남편을 보니 분통이 터졌지만 화낼 시간이 없다. 자야 할 뿐.

다음날 더욱 독감 증세가 심해졌다. 

집에 와서 오랜만에 남편에게 화내고 싶었는데 출장을 가버려서 혼자 분을 삭였다.

남편이 출장에서 돌아올 때쯤 나도 독감이 완치되어 딱히 화낼 일이 없었다. 서로 바쁘므로 화낼 타이밍도 안 맞는다. 바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게 되었을 뿐.

행복한 가정이란 어쩌면 얻어걸리는 걸 지도 모름.



매거진의 이전글 65.완벽한 주말은 금요일 밤부터 시작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