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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인미D Feb 04. 2024

4.나의 시그니처 백발 안녕

<시니어가 되기엔 애매한 나이. 아직도 내가 아기라니.>


젊음을 추구하는 세상이지만, 사실 나는 빨리 늙고 싶었었다. 


한국은 나이로 서열 매기기를 중시하는 문화라 사회생활에서 실제 숫자의 나이가 많거나, 하다못해 얼굴이라도 노안인 사람은 이득이 되는 경우가 많다. 


 40대에도 얼핏 보면 어려 보이는 얼굴은 사회생활에서 좋지 않다.

심지어 직급도 없어진 이 시대에 내가 몇 살인지 가늠하기란 어렵다. 그래서 의지할 것은 빨리 하얘진 흰머리 밖에 없었다. 나이대로 인정을 받기 위해선 흰머리에라도 기대야 했다.

간절했다. 


 디자인 일이 MAC 앞에서만 작업하는 우아할 것 같은 일로 상상되겠지만 제작 일도 많아서 현장 사람들(인쇄 및 생산)과 몸소 부딪혀 싸워야 할 때가 많다. 

현장은 상당히 거칠며 아버지뻘 사람들과 맞서서 설득해야 한다. 현장의 '곤조'를 이겨내기 위해서 동안은 전혀 전혀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사회생활에서 어린 외모가 도움이 되는 경우는 없었다. 

프로페셔널해도 미숙하게 치부해 버리고, 맞는 말 하면 건방지다고 더 욕먹는다. 실무도 모를 것 같은 디자인을 전공했다는 어린 여자애가 공장에 와서 현장 생산에 관여하면 기장님들은 화를 많이 낸다. 

내가 클라이언트고, 내 디자인이 생산되는 상황이라도 어린 여자 신분은 내 의견이 들어갈 여지를 안 준다. 기장님께 쌍욕을 먹고 공장에서 쫓겨나 논두렁 위에 벌서듯 서 있었던 적도 있다.(요즘은 기장님들이 세대갈이가 되어서 비교적 젠틀한 경우가 많다. 예전에는 정말 너무나도 거칠었다.ㅠ 독종인 나도 몰래 많이 울었다.)


어린 여자 선입견에 갇히면 중책에서 배제되거나 실적 기여에 대해 제대로 인정받고 보상받기 어렵다. 최근 꽤 달라진 부분도 있지만 실제 내가 대리급일 때까지 자주 겪던 일이다. 

지금도 현실 숫자로는 나이를 먹었지만 자칫 어리게 보이는 외모로 인해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경향이 있다. (죄송한 말이지만 평생 노안이나 제 나이 외모대로 살아온 사람은 인지 못할 미묘한 순간이 많다.)


그러나 흰머리 성성하고부터 세상의 대접은 꽤 많이 달라졌다. 

프로젝트의 중책을 담당하고 능력에 호평이 많아졌다. 흰머리는 유능한 디자이너로 설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나는 늘 하던 대로 해오고 있는데 더 잘한다는 평가가 이어진다. 업무능력에 외모가 기인하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 흰머리의 마법은 매번 느끼는 중이다. 젊은 친구들과 함께 미팅을 들어가면 이젠 누가 봐도 내가 선임으로 보인다. 이 머리색 덕분에.


얼굴이 적당히 중후하고 덩치가 다른 사람들보다 큰 것은 능력을 평가하는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실제로 성공의 위치에 이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후덕하고 덩치가 10% 정도 더 크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같은 능력이라도 등빨이 있으면, 인지도와 시각적 영향력을 발휘해 지위가 높아지기가 쉽다는 것.


이 판국에 몸도 왜소하고 동안인 내가 싸울 무기가 없다. 그러니 그동안 이 흰머리가 얼마나 소중했겠는가.

그러나 이 소중한 백발을 쭈욱 유지할 수 있었으면 참으로 좋았겠지만, 그레이 헤어와 이별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나의 모델 수업 도전기 때문에. 



본캐와 부캐가 싸우고 있다.

본캐는 늙어 보이라고 한다. 그러나 부캐는 어려 보이라고 한다.


              "나의 시그니처 백발 안녕~"


시니어가 되기엔 애매한 나이. 40대 중반.

모델 클래스 선생님께서 진지하게 이미지 변신을 제안해 주셨다.

"혹시 가능하시다면, 검은색 머리로 염색하고 오실 수 있나요?"


아직 나에게 백발은 이르다는 것.

내 머리가 반이상 백발에 가까워진 건 5~6년 정도 되었다. 같이 요가를 하는 선생님들도 자연스럽게 하얘진 백발이 멋지다고 했다. 나는 이 자연스러운 노화 스타일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시니어 모델이 된다는 것은 나 자신의 나르시시즘만을 만족시켜서는 안 되는 영역이다. 

물론 내가 지금 당장 모델이 되어 현역 활동을 위해 염색이 필요한 단계는 아니다. 그러나 내 취향을 떠나서 대중적인 모델 비즈니스에서 필요한 스타일을 찾아가는 과정 또한 중요한 부분이다.


'나는 이런 스타일이 좋아.'라고 고집한다면 혼자서 잘 꾸미며 살면 된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인 치장 영역이 아닌, 모델이라는 비즈니스 영역에 발을 들였다.

내 취향보다 중요한 것은 업계 사람들의 요청이다. 내 테이스트보다 전문가의 선택을 믿고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모습을 만들어내야 한다. 사실 전문가들이 원하는 모습이 그 비즈니스에서 최고의 모습이다. 나보다 전문가인 그들이 더 잘 안다. 

그들은 내 아름다움을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나를 이용해 그들의 제품을 최고로 보일 수 있게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 


공주가 되어 개인적인 취향을 마음껏 발휘하며 나의 아름다움을 가장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은 웨딩촬영이다. 신부가 주인공인 웨딩 촬영은 누구도 그 취향에 반기를 들 수 없다. 이런 촬영만 경험해보고 모델 영역에 들어간다면 촬영에 왜 내 취향과 의견이 중요하지 않은가에 대해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내가 이 업계를 잘 이해하는 이유는 내가 디자인한 제품을 늘 최고의 모습으로 촬영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촬영 PPM을 기획할 때 중요한 것은 제품이 가장 돋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촬영 현장에서도 나 외에 스타일리스트와 포토그라퍼의 의견도 상당히 중요하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반영해 가며 수정을 거듭할 때 촬영은 늘 최고의 결과로 끝나는 것을 경험해 왔다. 

촬영 현장에서의 변수도 잘 이용하면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늘 열린 마음으로 촬영에 임해야 하는 것이다. 

현장은 그야말로 Change is the plan!!!


물론 전문가가 제안한 이미지 변신이 내 개성과 잘 어우러지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내가 원하는 모습만을 고집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오로지 내가 원하는 형태로만 내 모습을 만들려면 자신만을 만족시키는 개인영역에 머물면 된다.(방구석 패션쇼만 한다면 머리를 빡빡 밀든, 파랗게 하든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미와 취향이야말로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인 것을... 즐기고 싶다면 혼자 놀면 된다.


하지만 비즈니스 영억에 진입하려면 사적인 취향이 주요 검토사항은 아니다.

이 분야는 내가 원하는 모습 말고 업계 전문가들이 제안하는 모습을 받아들이고 변화하는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한다. 혼자의 취향 충족이 아닌 대중들에게 공감되는 내 이미지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되고 싶은 워너비와 롤모델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을 위해 다양한 변화를 이해해야 한다.

솔직히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다고 생각하면 편할 것 같다.


내가 이 모델 수업을 시작하지 않았으면 절.대.로. 머리 염색을 하는 일이 없었을 거다.

나이나 얼굴에 비해 머리가 빨리 새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이것 자체가 나의 유니크함으로 여겼고 그렇게 살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런 변화의 시작이 또 다른 나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생각한다.

같은 모습과 같은 자리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인생에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기가 어렵다.

때로는 내 취향에 이런 건 절대 안 해봤을 것 같은데 싶은 것도, 이런 기회를 통해서 접하고 변화를 시도해 봄으로써 다양한 가능성을 만날 수 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자신만의 편견과 제약에 갇히기 쉽다

다른 사람들 의견에 열린 귀가 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어느 나이에 이르러서도 성장하고 있는 새로운 자신을 만날 수 있다. 

우연히 지나갈 상황도 열린 마음으로 대할 때,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모델 수업을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내 스타일을 최대로 뽐내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이것은 미인 대회가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비즈니스 상황에 맞춰 어울리는 모습으로 적응하고 변신해야 한다. 

내가 원하는 내 모습이 중요한 게 아니다. TPO에 따른 연출과 변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픈 마인드로 다양한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다행히 내 직업이 디자이너다 보니 언제나 작업물이 대중에게 노출되고 평가당해왔다. 그에 따라 변화를 받아들이면서 빠르게 수정하고 적응해야 하는 삶을 살았다.

이번에도 나는 빠르게 피드백을 받아들였다. 

좋은 의견은 늘 1초 만에 흡수한다. 그래서 닉네임도 흡수1초다.


처음에 검은색 머리 염색을 제안받았을 때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내 사회 경력에 문제를 끼칠 것 같았다.

그러나 지난 몇 년간 나는 노련한 프로페셔널 이미지를 어느 정도 구축해 왔다. 잠시 머리색깔이 변한다고 그 인정이 달라지지 않으리라 스스로 믿어보기로 했다. 혹은 약간 이미지 손상에 문제가 있어도 어쩔 수 없다.

원래 하나를 얻기 위해 다른 것은 약간의 희생이 필요하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다. 

인생은 원래 기회비용이다. 

하나를 포기하고 또 다른 하나에서 새로운 기회와 방향을 얻기도 한다.


사람들은 메이크업 습관, 패션스타일이나 헤어스타일, 머리길이나 컬러에 관해서는 자신만의 확고한 취향이 있다. 머리카락 몇 센티 다듬는 것조차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자신의 세월과 취향을 무시당한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건 과잉 감정이입이다. 이 전문가들은 나를 망치기 위한 게 아니라 나의 최고의 상태를 끌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것은 일이다 생각해야 하고 내 외모는 비즈니스 상황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머리카락은 언제든 다시 자라난다. 일상에서 내가 원하는 머리길이로 매일 살 수 없다는 안타까움도 이 분야에 발을 들였다면 감수해야 한다.

연예인들이 새 배역을 맡고 삭발을 한다던가 전체 모발을 탈색하는 형태처럼. 내 몸을 현장에 직접 투입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걸 원하지 않는다면 조용히 책상 앞의 사무직이 되면 된다. 내 본캐인 사무직은 내가 외모를 어떻게 꾸미든 제약이 없다.


 아직 내 얼굴이 시니어가 되기에 세월의 시간이 모자라다. 

선생님은 이 백발이 나와 어울려 시니어 비즈니스에서 통하기 위해서는 최소 15년 세월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아직 내 것이 되기에는 어색한 백발.

나는 이 백발 머리를 너무 사랑했다. 얼굴을 보면 젊어 보이는데 머리는 백발인 이 아이러니한 조화도 유니크하다고 생각했다. 초면에 대체 몇 살인지 궁금하다는 사람들을 놀리는 재미도 있었다. 심지어 회색 염색이냐 묻는 사람도 꽤 있었다. 그런 반전 재미도 안녕~.


이제는 반전이 아닌 직관, 1차원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까만 머리가 되어 동안을 추구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 나는 어떤 역할을 맡을 수 있을까?

잠시 시니어를 꿈꿨지만 이 세상에서는 아직도 내가 어리다니...

이 나이의 사람들은 사실 시니어가 아니라 인생의 전성기이자 삶이 한창이길 바란다. 40대지만 20대 같은 외모와 열정을 갖고 싶은 것이 중년의 욕망 아닐까? 

자연스럽게 늙어간다는 주제는 조금 더 나이가 있어야 통용될 것 같다. 아직은 젊음을 추구하고 청춘을 극대화하는 것에 포지셔닝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의 시니어는 참~~ 멀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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