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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인미D Mar 03. 2024

73.망해도 한 템포 쉬다 가시죠?

<좋은 일들이 나도 모르게 스며들고 있으니 느껴봅시다. 스며듦!>


잘 안 풀려요? 자 심호흡~

오늘이 지구의 마지막 날이 아니기에,

아직 해야 할 일과 살아갈 날이 많으니까요.


현실은 언제나 망해가는 느낌이다. 내 삶이 어찌 이리도 꼬이고 잘 풀리는 날이 없을까?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괜찮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느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드라마 속 주인공은 어려운 시간을 겪고 있어도 노력 끝에 결국 잘 풀리고 어떤 것을 이루게 된다.

현실은 그런 노력의 과정을 거친다고 매번 잘 되는 것이 아니다.  

대체로 수많은 불발과 망한 순간이 쌓여가는 것이 현실이다. 

아주 가끔 운이 좋다면, 인생이 잘 풀리는 것을 한번 정도씩은 느낄 수 있다.


현실 인생에서 잘 풀리거나 대박의 순간은 로또처럼 별안간 떨어지지 않는다. 기절할 것 같은 환희와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는 감격의 순간을 경험하기는 상당히 어렵다.

돌아보면, 꽤 잘 풀리는 일들은 강력한 한방이 아니었다. 습자지에 물이 스며들듯, 아주 서서히 삶에 들어와 채워진다. 좋은 일이 생겼다고 인지하기도 힘들 정도로 서서히 젖어든다

한참 지나고 나서야 '꽤 괜찮았던 경험이었군.'이라거나 '좋은걸 지금 내가 가지고 있군.'이라고 인식하게 되기도 한다. 


이마저도 스스로 성찰이 가능한 시점에서야 깨닫게 된다. 

대부분 잘 풀렸던 순간을 좋았다고 인지하게 되기보다는 감사와 행복을 느끼기도 전에 훅 지나가버린다. 그렇게 뒤늦게서야 되돌아보고 회한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일상의 기쁨은 인지하기가 이토록 쉽지가 않다. 


잘 풀려가는 시기는 그라데이션처럼 서서히 물들어가 새로운 빛깔로 바꿔주기 때문이다. 너무나 미묘해서 젖어들고 색이 바뀌어가는지 느끼지도 못하게 된다.

어제와 오늘의 상황이 극명하게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 1년 혹은 훨씬 긴 세월에 걸쳐 아주 서서히 스며들어가기 때문에. 

어제의 나와 비교해 보면 제 자리인 것 같은데 작년의 나를 돌아보면 지금과는 다른 위치에 서 있었다. 나는 서서히 조금씩 물들어왔고 바뀌어갔다.


게다가 우리는 기쁨을 감지하는 촉보다 불행을 감지하는 촉이 발달되어 있다. 그렇기에 대체로 좋은 순간은 놓치기 쉽다. 반면 불행의 감정은 오래오래 기억하거나, 미리 불행하고 지속적으로 괴로워한다.


삶의 중요한 것들은 찰나의 감정이 아니다. 스며듦의 법칙을 기억해야 한다.

인생의 많은 일들은 지속성이며, 극단적으로 멋진 엔딩은 없다. 어제와 다른 극단적 엔딩은 죽음뿐이다. 

대부분의 삶은 과거로부터 은은하게 이어지는 그라데이션이다.

나도 모르게 힘들게 지속하는 하루에 서서히 좋은 일들은 스며들고 있다. 내 촉이 행복보다 일상의 불행을 더 크게 감지하고 있을 뿐.


살아가며 많은 일들을 접하며 긍정보다는 부정의 순간을 많이 맞이할 수밖에 없다. 좋은 결과는 스며들겠지만 나쁜 상황들은 매분, 매초 나를 강타하기 때문.

그래서 흑역사를 누적해 가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불쾌한 일들 수십 개가 쌓여야 좋은 일 한 개가 생긴다 생각하면 된다. 

사실 부정의 수많은 베이스 위에 스며든 긍정의 감정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딱히 긍정의 감정을 찾지 못한다고 해도 살아가는 건 대체로 조금은 우울한 것이 디폴트라고 이해해 버리면 된다.

현실이란 멋진 한방보다는 대체로 지지부진한 수많은 시간의 누적이라 이해하는 편이 정신건강에도 좋다. 


몹시 안타깝게도 성취나 기쁨은 미처 인지하기도 전에 휘발되어 사라진다. 지나가고 나서 혹은 잃고 나서야 이미 내가 가진 것을 이해하게 될 때도 많다.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내느라 정신 팔려, 서서히 젖어든 성취와 기쁨을 실감하기가 어렵다. 

그저 살아가는 하루는, 삶의 피로감과 숙제 같은 일상의 과업을 처리하느라 분주했을 뿐이다.


그러나 망했다는 생각이 들 때 한 템포 쉬다 보면, 의외로 많은 것을 이뤄냈고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바닥을 치는 절망의 감정 속에서 그렇게 다시 무언가를 할 힘을 얻게 된다.

모든 것을 다 잃었다 느낄 때, 한 호흡 쉬면서 돌아보면 그럼에도 아직 가지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살아가며 우리는 수많은 재능의 영역과 비재능의 영역을 만난다.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며 내려놓거나 포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비재능의 영역이라도 넘사벽은 아니다.

비재능의 영역을 이겨내는 건 오로지 몸으로 쓰여내는 시간의 양일뿐이다. 재능의 스탠스로 있는 사람들보다 더 긴 시간 동안 몸으로 때우며 버텨내야 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어떤 시작이든 모든 사람들의 출발 조건은 동일하지 않다. 재능 있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보다 더 노력해야 하는 자신을 비관하고 억울해하며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런 도피 경험을 쌓아온 사람들은 늘 자신의 가능성을 무능과 약자 프레임을 씌워 한발 더 움직이는 것을 제한한다.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운 좋게 타고났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그들도 다른 부분과 다른 영역에서 만들어온 노력이 이곳까지 이어진 것일 뿐이다. 

재능인들도 많은 영역에서 몸빵으로 비재능을 재능으로 바꿔온 사람들이다. 


그저 나는 이 영역을 처음 만드는 영역이다 생각하고, 조급함을 내려놓고 더 많은 시간을 정성스럽게 투자하면 된다.

해보기 전에는 많은 것들이 의심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해보면 알게 된다.

비재능의 영역은 몸으로 시간을 쌓아가면 결국 접근 가능한 영역으로 바꿔준다는 것을.

이런 비재능을 나만의 것으로 하나씩 만들어낸 사람들은, 결국 어떤 영역을 처음 접할 때 재능의 영역으로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믿을 건 이거 하나다. 느리지만 계속하면 비슷하게 된다. 그러니까 너무 멀리 보고 결과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의심할 시간에 지금 서툰 내 몸을 움직이기만 하면 언젠가는 많은 영역을 재능의 스탠스로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인생은 극적인 성취감 뒤에 끝이 나는 엔딩이 아니다. 수많은 비재능의 영역을 온몸으로 부딪히며 시간을 통과해야 하는 과정을 이어갈 뿐이다. 이 과정에서 기쁨은 스며들어 인지하기 어렵고 매일의 도전으로 힘겨운 시간만 강력하게 느껴질 수 있다.

성취 뒤에 버텨내야 하는 현실 과제만 잔뜩 있다. 이것이 현실이다.

대학 합격장을 받는 순간 기뻤을까? 압학식 이후 학교 공부를 따라가야 하고 스펙 만들고 취업하느라 즐길 새가 없다.

취업 합격 메일을 보고 기뻤는가? 곧 출근할 회사에서 매일 지옥을 맛보며 벗어나고 싶다고 소리치는 일상이 이어질 것이다. 

현실이란 이토록 괴로움을 무던하게 이겨내야 하는 숙제만 남아있다.


찬란한 기쁨은 아주 찰나일 뿐.

살아가는 많은 시간들은 흑역사를 쌓고 비재능의 영역을 시간으로 쌓아 몸소 커버 쳐야 한다.

그리고 행복한 순간은 스며들어서 깨닫기도 쉽지 않다.



영화 패밀리맨에서 주인공 잭 캠벨은 천사를 도와준 대가로 가보지 않은 인생을 한번 살아보게 되는 기회를 얻는다. 그는 사회에서 부와 명성을 거머쥐고 성공한 그의 첫 번째 삶과 다른 평범하고 현실적인 두 번째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두 번째 삶에서 벗어나 다시 첫 번째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두 번째 엿보기 삶을 비관하며 살아가던 주인공은 퇴근 후 쇼파에 앉아 지친 하루를 돌아보다 문득 깨닫게 된다. 이런 사소한 순간들이 행복한 시간으로 채워진 인생이라는 것을...

너무 자연스럽게 행복의 감정이 스며들어 인식하지 못했고 일상의 과업을 처리하느라 깨닫지 못했던 충만한 감정을 알게 된다.

삶의 기쁨이란 그런 것 아닐까? 이미 우리는 좋은 일들에 젖어 있는데, 너무 자연스러운 그라데이션으로 물들어가고 있어 미처 인지하고 못하고 있는 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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