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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인미D Feb 24. 2024

72.힘들지? 에스프레소 원샷하고 다시 시작해.

<회사에서 허락해 준 마약, 에스프레소>


회사에서 허락된 마약, 아니 에너지 드링크. 에스프레소.

너무 지칠 때 이 한잔을 원샷하고 나면 혈관을 타고 흐르는 강력한 각성이 느껴진다.

여기에는 아메리카노나 카페라떼와 비교가 안 되는 힘이 있다.


에스프레소 1샷 30CC

아메리카노나 카페라떼에도 똑같은 샷양이 베리에이션 되어 있지만, 물이나 우유로 희석하여 천천히 마시는 것은 에스프레소 싱글 샷을 빠르게 원샷하여 얻는 힘과는 다르다.



10년 전 대표님과 해외 출장을 갔다.

우리는 세계 차(Tea) 마켓을 조사하고 있었다. 매일 10시간 이상 걸었다. 식사도 걸어가면서 먹거나 서서 대충 간식으로 때웠다. 대표는 자수성가의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난 디자이너였지만 비서까지 대행하고 있었으므로 지도 보랴, 대표님 의전하랴, 시장조사하랴, 샘플 사랴 정말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이렇게 지내니 체력에 한계가 왔다. 불같은 대표님이었지만 어느 날 난 용기를 냈다. 차 회사 대표였기에 우리는 커피를 마시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파리, 출장 중이다. 오늘은 예외로 둘 수 있지 않을까?


"사장님, 저희 에스프레소 한잔 원샷 하고 힘내서 다음 일정 시작하지 않으시겠어요?"


고생하는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그는 허락했다. 우리는 프레타망제에 들어가서 에스프레소를 시켰다. 

각설탕을 한 개 넣고 그 자리에 서서 두 모금에 끝냈다. 성질 급한 그에게 시간 낭비 없이 5초 컷으로 끝냈다.

대표는 이것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그날 이후 우리는 매일 일정 중간, 지칠 때마다 에스프레소를 마시러 갔다.

에스프레소 한 샷을 마시는 것은 그야말로 커피 수혈 그 자체의 느낌이다.


나는 이 날의 에스프레소 한잔의 힘을 잊지 못한다. 

정말 죽을 만큼 힘들 때 쓰디쓴 한잔이면 다시 살아난다. 이때 파리에서 다양한 맛의 에스프레소를 즐겼다. 

요즘은 에스프레소를 괜찮게 하는 곳이 좀 있지만, 10년 전 출장에서 돌아와 수많은 가게에서 에스프레소를 시켜서 마시며 실망을 거듭하게 됐다. 

크레마도 없는 아메리카노에 가까운 까만 물을 에스프레소라고 주다니...

그렇게 한동안 베리에이션 음료만 마시게 됐다.


그러다 요새 다시 에스프레소를 찾고 있다.

나는 요새 전혀 못 자고 못 먹고 있다. 기력이 딸리고 있다.


무엇을 위해 못 먹고 못 자고 있는 것일까?

잘 먹고 잘 자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충만한 인생일 수 있다. 

그러나 내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는 늘 못 먹고 못 잤다. 수능을 앞둔 고3, 대학교 졸업전시, 논문 학기, 취업 면접, 회사의 중요한 프로젝트를 앞두고 나는 늘 못 먹고 못 잤다.

저런 시절은 묵묵히 할일을 해내고 견디다 보면 지나간다. 


그러나 회사의 중요한 프로젝트는 시절을 거친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며 평생 반복되는 일이다.

그래서 요즘은 다시 에스프레소 수혈이 필요하다.


잠을 못 자고, 육체적으로 힘들고, 밥을 못 먹어도 에스프레소 한 잔의 에너지가 하루를 견디게 해 준다.


카페모카는 이제는 못 먹고, 당기지도 않는다. 나도 대학생 때는 달달한 커피를 좋아했다.

지금은 인생의 쓴 맛을 보면서 살고 있어서인지 에스프레소가 몹시 당긴다.




어제 점심시간에 동료와 스탠딩 에스프레소 바에 갔다. 

카페 가기 전까지도 외근을 나가야 해서 바쁘니까 커피는 패스할까 속으로 수없이 갈등했다. 그러나 에스프레소는 5초컷 아닌가?

동료는 카페라떼를 테이크아웃으로 주문했다. 내 에스프레소가 먼저 나왔다. 3모금 5초 컷으로 마시고 카페를 나왔다. 뒤에서 동료가 소리치며 나를 불렀다.

"내 커피 아직 안 나왔어." 

에스프레소 한잔에 각성이 된 나는 빨리 들어가 처리할 일 생각에 빠져 동료를 버리고 나왔던 것이다. 같이 왔다는 것을 순간 잊을 만큼.

다시 카페에 들어가니 카페 직원들과 직장동료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해프닝이 끝났다.

커피 각성... 이렇게 무섭다.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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