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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치앙마이 요가 리트릿 특별편5

남한테 잘해주기보다 어려운 나에게 잘해주기.

by 전인미D

겨울에 여름나라로 여행 가는 설렘이 있다.

도착할 때가 되면 비행기 안부터 조금씩 더운 공기 냄새가 들어온다.


이런 기분 잊고 있었다.

계절이 바뀌면 기분도 바뀐다.

공항을 나서자 여름의 나라로 온 것이 실감이 났다. 추운 걸 좋아하지 않아 오랜만에 더운 날씨를 느끼니 한결 마음이 느긋해진다.

반대로 내가 여름에 있다가 겨울로 가본 적은 없지만(귀국 제외) 아무리 생각해 봐도 겨울에서 여름의 계절로 건너뛰는 것이 훨씬 내가 선호하는 형태다.


어릴 때도 생각해 보면 추운 겨울날보다는 여름방학이 다채로운 추억이 훨씬 많았다. 겨울에는 아무래도 실내에만 있게 되지만 여름에는 더운 줄도 모르고 여기저기 많이 다녔다.

지금이야 여름이 된다고 추억놀이 할 시간도 없고 아이스커피나 마시며 시원한 사무실에서 모니터를 노려보는 루틴 한 삶이 이어질 뿐이지만.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계절을 뛰어넘어 여름으로 시작하는 이 기분이 꽤 신선하다.

지난 10년간 계절이 바뀌는 여행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하루를 버티느라 힘들어서 굳이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나 변화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오늘 하루는 내일 일을 잘하기 위해 빠른 귀가와 충전을 하는 시간일 뿐이었다. 나에게 오늘은 없고 그냥 내일을 위해 비축되는 시간일 뿐이다. 오지 않을 내일만 보고 살았다.


그렇게 나는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남에게 잘하느라 나에게 잘할 시간을 놓치면서...

세상에 빈틈없이 보이느라 내 일상은 빈틈 투성이로 만들면서...


이번 여행에는 나에게 한번 잘해줘 보자.

십 년간 여행을 안 다니다 보니 해외로 가는 것이 귀찮고 부담스럽긴 했지만, 막상 리조트에 도착하니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날씨, 이 공간 나에게 잘해주기 딱 좋다.

내일을 위해 걱정하는 게 아니라 오늘을 나에게 완전히 줄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에게 잘해주는 건 상당히 어렵다.

타인에게 잘해주는 건 작은 선심, 따뜻한 말 한마디, 약간의 도움으로도 완성할 수 있지만, 나에게 잘하는 건 그렇게 쉽게 만들 수 없다.


'너 자신에게 잘했다고 칭찬해, 고생했다고 위로해.'라고 생각은 하지만 이미 내 마음은 자책하고 괴로워하는 중이었다.

보이는 행동과 말만으로 나에게 잘해줄 수 없다. 그 진실의 여부는 내가 잘 알고 있으니.

말로만 자신에게 수고했어라고 해봤자 하나도 안 수고했다는 진심이 나오면 틀려먹은 거다.

내 마음은 나를 위해 거짓으로 위장할 수가 없다.


타인을 위로하기보다 어려운 게 스스로 위로하는 것이고 타인에게 잘해주는 것보다 어려운 게 자신에게 잘하는 것이다.

나를 미워하거나 재촉하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만 해도 참 잘하고 있는 거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은 그렇게 느긋하게 자신을 내버려 둘 수가 없다.


리조트에 머무는 시간은 처음은 새로웠지만 점점 익숙해져 갔다. 이때가 정말 중요한 시간이다.

적응이 끝나면, 그곳이 일상이 되고 평화를 느낄 준비가 끝난 것이다.

사실 첫날에는 도파민이 폭발해 느긋하게 마음먹을 겨를이 없었다. 내 시선과 감각이 온갖 새로운 것을 흡수하느라 멈출 새가 없었다.


사흘정도 지나니, 작은 루틴이 생겼다. 새로운 것을 흡수하기를 멈추고 공간에 젖어들면 된다. 늘 여기 있었던 사람인 것처럼.

요가 수련 외에 크게 고민할 것도 챙겨야 할 자잘한 일상이 많은 것도 아니다. 일상의 숙제가 없는 곳에서는 나를 내버려 두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언제 이렇게 시간을 온몸으로 느껴봤는지 모르겠다. 신생아 때나 가능했겠지만 아기 때 기억이 전혀 없으므로, 지금이 거의 처음이라는 마음으로 시간을 몸으로 느끼며 모든 순간을 채웠다.

별 할 일도 없이, 중요할 것도 없이...사실 수련이 많고 바쁘긴 했지만 그 사이 생각을 할 틈도 많았다.


지나고 보니 나에게 잘해주는 건 별달리 어려운 건 아니지만 일상에서는 조금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장소가 급변하는 여행지나 새로운 곳에서도 어렵다. 적당히 새로움과 일상이 뒤 섞인 곳에서 하는 것이 쉽다.

그래서 짧게 장소를 찍고 떠나는 여행보다 이렇게 일정 시간 일상으로 채울 수 있는 여행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이곳에서 나는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생각을 참 좋아하는데 서울에서는 늘 바쁜 생활이 이어지니까 늘 스스로에게 쓸데없는 생각 그만하고 행동이나 하라고 다그쳤다.

리조트에서는 여한 없이 생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었다. 평소라면 이 생각 글로 써야 한다며 노트북을 열었겠지만, 이미 도착 첫날 고장이 나버렸으므로 어쩔 수 없이 우주 먼지로 생각들을 흘려보냈다.


그 어떤 생각을 글로 붙잡지 못해도 아쉽지 않았다. 좋은 생각을 글로 붙잡아야 한다는 강박이 없었다.

쇼핑을 해서 물건으로 소장하는 소비가 아닌, 일회성 도박으로 돈을 탕진하여 즐거움을 만끽하듯 기록 없이 생각을 즐기고 소비했다.

나에게 남는 글이 없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오늘 이 순간 즐거우면 그만.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 보면 오랜 시간 설표를 찍기 위해 설산에서 잠복하던 사진작가 숀은 정작 설표가 나타나자 셔터를 누르지 않는다.

정말 아름다운 순간은 카메라로 방해하고 싶지 않고 그저 그 순간에 머물고 싶다는 그 말. 소중한 사진 한컷 건지는 것보다 중요한 건 그 순간에 지금, 여기 머무는 것 그 자체.


현재를 온전히 느끼고 느긋하게 물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생각하기. 이런 사소한 게 나에게 잘해주는 것이라는 느낌이다.

대체로 우리는 생각할 틈 없이, 머무를 틈 없이 살고 있다.


흘러가는 대로 생각을 하다 보면 아무 생각도 안 들고 그냥 자연을 멍하니 보고 있게만 된다. 생각을 온전히 다 해서 털어버리지 못해서 늘 마음이 답답하다.

생각을 끝까지 따라가며 마주할 결론이 두렵기도 하다. 그렇게 생각을 무시하고 못 본척하고 살게 된다.

그러나 생각의 끝을 따라가 보니 별다를 게 없다. 이렇게 한번 생각의 끝을 마무리해야 오늘과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공간이 생기게 된다는 걸 느꼈다.


어릴 때는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오늘을 즐겼다. 어른은 늘 내일 뿐 아니라 먼 미래도 고민해야 하는 삶이지만.

그래서 자꾸 오늘을 채우는 것 혹은 비우는 것을 놓치게 된다.

내일의 걱정을 못 본 척하고 싶어서 자꾸 쓸데없는 중독에 빠지게 된다. 게임, 술, SNS, 쇼핑...


오늘도 없고 내일도 없는 곳에 나에게 잘해주는 방법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별다른 생각 없이 평화로운 명상은 처음이다.

리조트의 생활은 단순했고 그에 맞춰 생각들을 모두 흘려보내니 나도 단순해졌다.

아침에 일어나 요가를 했고, 끼니마다 식사를 했다.

평소에는 매일 한 끼만 먹었지만 심지어 이곳에서는 세끼를 모두 먹었다. 단순한 일상을 반복하며 지금 먹는 음식이 맛있고, 오늘의 햇살이 참 눈이 부시고 평화롭다는 생각만 했다.


일상에서 단순한 감각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나에게 잘해주는 작은 방법이 된다.


물론 서울로 돌아온 지 한 달이 지났고 많은 것들은 리셋이 되어버렸지만.

여행이 행복할수록 돌아온 일상에서 허탈감이 많이 느껴진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비워내고 나를 챙겨보는 리트릿을 건강하게 마치고 나니 돌아온 일상을 담대하게 받아들일 힘이 생겼다.

내 삶은 지옥이 아니라, 다양한 챌린지가 있는 곳일 뿐.


치앙마이에 다녀오고 요즘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있다. "하? 재밌네."

어떤 이상한 일이 생겨도 재밌는 경험 아니겠는가. 지루한 인생보다 낫다고 생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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