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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여름이 본격적이지 않다고

<강제 여름 추억 소환...혹서 체험.>

by 전인미D

25/7/7


소서. 한 여름 더위의 시작이다.

그러나 우리 집 에어컨은 수리가 되지 않고 있다.


6월까지는 참을만했다. 7월이 되면서 본격적 더위에 미리 A/S 신청을 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절기는 소서小暑. (작은 더위)

아직 여름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도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니 그럼 본격적이면 어떻게 되는데... 대서에 앞서 에어컨 수리라는 숙제를 해결해야 한다.


당연히 어릴 때는 집에 에어컨이 없었다.

그때는 더위를 많이 타지도 않았는지 더위로 고생한 기억이 전혀 없다.

그냥 아이스크림을 먹고 바다에서 한 달 내내 살면서 여름과 더위를 즐겼다. 여름도 좋고 방학은 더 좋았다. 싫다거나 불편하다는 기억은 전혀 없다.

중학교 때는 부채질로 견뎠다. 고등학교에 가서야 교실에 선풍기가 있었다. 꽤 쾌적하지 못한 어릴 적 여름이었는데 그럭저럭 잘 지냈다.

여름의 더위는 그냥 익숙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어른이 된 나는 조금의 불편함도 견디지 못하는 인내심 0%의 인간이 되었다.

더위를 참기보다는 에어컨을 하루 종일 틀었다. 안 그래도 짜증 나는 세상인데, 더위까지 나에게 불쾌감을 더할 수 없다. 당연히 문명의 이기를 적극 활용하는 어른의 인생이다.


그러나 부득이한 에어컨 고장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는 여름이 시작됐다.

실내는 바깥보다 더 덥다. 왜 어르신들이 에어컨을 안 켜고 집 밖에 나와 더위를 피하는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 그러나 나도 똑같이 부채를 흔들며 집 밖에 나갈 순 없었다.

더위를 이기기 위해 지혜를 짜내야 했다.

하루 종일 요가복 차림으로 배를 까고 다니니 아랫배가 아프다.

원래는 여름에도 찬물을 먹지 않지만, 요즘은 얼음물 없이 못 사는 사람이 됐다.


어릴 때 봤던 홍콩영화에서 학생들이 교실에 세숫대야를 가져다 놓고 발을 담그고 있던 장면이 기억이 난다. 저걸로 시원해질까? 그냥 드라마적 장치인가? 싶었는데... 정말 집에서 더위를 참다 참다못해 수시로 발을 찬물로 씻어내며 제목도 모를 그 영화가 생각이 났다. 아 효과가 있구나~ 세숫대야에 찬물을 채워서 식탁아래 둘까 순간 고민을 했다.


저녁시간 샤워하는 물은 온기가 1도도 없는 찬물이다.

이 찬물을 연거푸 정수리부터 뿌려야 체온이 조금 내려간다. 물을 처음 맞을 때는 두개골이 깨지는 고통이 느껴지지만 점점 익숙해지면 쾌적한 느낌이 된다. 대체 얼마나 더워야 이 얼음장 같은 물이 이렇게 기분 좋은 찬기로 느껴지는지.

마무리로 목 뒤쪽에 다시 찬물을 가득 뿌려 냉기를 몸에 가둔다. 역시 목덜미 온도가 관건이다. 그리고 발~


문제는 잘 시간이다. 너무 더워서 잠이 잘 오지 않는다. 이불도 거추장스러워 맨바닥에 누워 이불 없이 잠이 들었다. 어릴 때는 침대 없이 잠을 못 잤는데 이제는 바닥에서 이불 한 장 안 깔고 노숙체험 중이다. 고양이들은 이 더위에도 불구하고 우아하게 이불 위에서 자고 있는데 인간인 나는 바닥 살이다.

차가운 바닥은 내 몸의 온기로 점점 뜨뜻해진다. 땀이 흘러 맨살과 바닥이 끈적하게 들러붙는다. 이때쯤 몸을 옆으로 이동해 아직 차가운 바닥 쪽에 몸을 옮겨 누워야 한다. 밤새 자리를 조금씩 이동하며 잠이 들었다 깼다를 반복한다.


이때 귀여운 고양이가 품에 안기면 너무너무 지옥이 된다. 물론 털코트 입고 다니는 자기들이 제일 힘들겠지만 더운데 왜 굳이 굳이 집사 품을 찾아오냔 말이다. 함께 땀을 뻘뻘 흘리며 잠이 든다. 어쩌면 기절한 건지도.


이 더위 속에 한동안 지내다 보니 더운 나라 사람들이 왜 느리고 게으른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더위 때문일까? 사고의 차원이 어린 시절로 갔다가 영화로 갔다가 글로벌하게 흘러간다.

더위에 녹아 흐느적댈 때는 도무지 고차원적인 일을 하고자 하는 의욕이 안 생긴다.

웬만한 걸 봐도 그러려니~가 된다. 고양이가 바닥에 토를 했다. 그러려니... 일어나려니 도무지 힘이 없다. 당장 안 치워도 뭐 괜찮잖아~그러려니~허허.


그래도 그중에 집안일 보다 앉아서 책을 보고 공부를 하는 게 더위를 잊기에 낫다. 공부에 집중한 순간 더위를 잠시 잊기까지 했다.

하도 더워서 모든 것을 미룬 채.... 힘이 없어서 기절한 듯 바닥에 누워 멍하니 책을 보는 맛도 있다. 사람이 반쯤 정신이 나가있다 보니 쓸데없이 폰을 한다거나 넷플릭스를 보며 시간을 날리지 않았다. 전자기기는 더욱 뜨겁다.

최대한 느릿느릿 독서에 집중했다. 이 더위에 힘이 없으니 의욕이 없고 다 재미가 없다.

어릴 때 여름은 참 재밌는 계절이었는데. 몸이 힘드니 살맛이 안 난다.


예전에는 여름만 되면 TV에서 납량특집 시리즈 드라마나 영화가 유행이었다.

전국적으로 에어컨이 없던 시절 그냥 물리적으로 소름 돋게 만들면 그게 시원한 거라 생각했다. 그 오싹함과 시원함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고요~웃음이 난다. 근데 이것도 이해해 버렸다. 하도 덥다 보니 추리소설이나 읽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정말 오싹해지고 싶었다. 강제로라도.

시원한 것 같은 착각이 들 수만 있다고 해도 뭐라도 선택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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