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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인미D May 10. 2023

24.남편의 용도

<나의 현실판 인간 대나무숲>


 가끔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닌데 아주 일상적인 이야기를 누구와 나누고 싶을 때가 있다. 너무 사소해서 뜬금없이 오랜 친구에게 전화하거나 부모님께 전화해서 이야기할 소잿거리도 안 되는 일상의 이야기가 있다.

 내가 오늘 점심을 뭘 먹었다든가, 화장실을 몇 번 갔는가 같은 정말 한 귀로 듣고 의미 없이 한 귀로 흘려보낼 정도의 가벼운 얘기들이다.


 이 사소한 이야기는 너무 별것도 아니기 때문에, 서론이나 배경설명이 너무 길게 되면 김이 빠진다. 앞뒤 맥락 정도는 생략할 수 있을 정도로 평소에 모든 것이 공유된 사이여야 가능하다.

 배경설명 없이 핵심적인 메시지로 전달해야 순간적인 맥락에서 오는 공감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대학시절 봤던, 미드 '섹스 앤 더시티'에서 우리 삶에 시시콜콜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주인공 캐리 브래드쇼가 이류작가 버거라는 남자친구를 만날 때 이야기이다.

(20년 전에 본 것이라 기억이 조금 왜곡됐을 수도 있음.)

 

 어느 날 캐리가 배심원으로 재판에 참석하게 된다.

 매번 법정에 갈 때마다, 또 다른 배심원인 옆자리 노신사가 서류가방을 열어 오렌지를 꺼내서 한번 바라보는 것을 보게 된다. 그녀는 법정을 다녀올 때마다 남자친구에게 "그 할아버지는 대체 무슨 사연으로 늘 서류가방에 오렌지를 넣고 다니는지. 그것을 왜 법정 안에서 꺼내보는지."를 별 뜻 없이 여러 차례 이야기 한다.

 며칠 뒤, 캐리 커플은 사이가 삐걱대며 말싸움 끝에 헤어지게 된다. 그날도 캐리는 법정에서 노신사를 보게 된다. 그 노신사는 그날따라 다른 과일을 꺼내 들었다.

 캐리는 집에 돌아와 이 사건을 나눌 데가 없어 홀로 공허함을 곱씹는다.

 그날 저녁 버거가 사과와 재회를 위해 캐리네 집에 방문을 했고,

 둘은 극적으로 화해한 뒤 캐리가 했던 가장 첫마디는

 "오늘 법정에서 그 할아버지가 가방에서 다른 과일을 꺼냈어. 뭘 꺼냈는 줄 알아?"였다.

 남자친구 버거는 "키위? 코코넛?."

 캐리가 웃으며 대답한다. "파인애플~."

 "으~거의 맞출 뻔했는데."


 

 위 에피소드는 별일도 아닌 일상 이야기를 나눌 존재의 부재로 생긴 마음의 구멍이 화해로 다시 채워지는 파트였다.

 캐리에게는 시도 때도 없이 만나 수다를 떨 수 있는 베스트 프렌드가 셋이나 있고, 속 편히 맘 털어놓을 게이 남사친도 있다. 그러나 그런 친구는 생활의 공간을 공유하면서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툭툭 자연스럽게 나눌 동반자(혹은 동거인)와는 다른 것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평생 죽을 때까지 열렬히 사랑할 수 있는 사람보다, 평생 사소한 일상을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구구절절 배경설명이 없이 본론만 얘기해도 이해가 되는, 나에 대한 수많은 데이터가 이미 확보된 존재 말이다.

 

 대단한 이유로 남편이 필요하다기보다 일상의 너무 사소하다 못해, 숨 쉬듯 별 거 아닌 얘기를 나눌 존재로써 그 의미는 충분하다.


 최근 길에서 어떤 할머니가 나를 스쳐지나 가는데 몇 해 전 젊은 남자들에게 한참 유행했던 러쉬의 바디스프레이'더티'의 향이 훅 풍겼다. 순간적으로 그 향을 따라 고개를 들어 그분을 자세히 살피게 되었다.

 귀여운 백발 단발머리에 옷을 젊은이처럼 아주 힙하게 입고, 에코백에 한 손에 고구마봉투를 들고 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얼른 집에 가서, 이 별거 아닌 힙한 할머니 얘기를 남편에게 하고 싶었지만, 그날따라 회식을 한다고 늦게 오는 바람에 얘기하지 못했다. 그날 나는 뭔가 안전부절 아쉬운 마음인 채 하루가 끝났다. 이런 이야기는 시간이 지나면 김이 샌다. 당일 바로바로 가볍게 치고 빠져야 한다.

 그래서 타이밍이 굉장히 중요하다. 오래 묵혀서 얘기할 비중 있는 주제도 아니다.


 함께 사는 사람에게는 어떤 소재로 웃길 필요도 없고, 일상의 대화는 둘만 오랫동안 알아온 이야기의 업데이트 자체로 굉장히 의의가 있다. 그 일상의 이야기들이 누적이 되어가며 둘만이 웃을 수 있는 이야기가 되기도 하고, 정말 별것 아닌 채로 흘러가기도 한다.

 둘 사이에는 특별히 애써서 해야 할 완성도 있는 대화 소재가 필요하지 않다.

 적어도 나는 누군가를 만나 대화할 때 엄청나게 애를 쓰는 편이라 편하게 맥락 없이 대화를 하는 것이 얼마나 내 삶에 큰 일인지 스스로 안다. 나에게 그럴 수 있는 존재는 사실 남편밖에 없는 것 같다.


 여기까지 말하면 기세등등 해질까 봐 우려스럽긴 해서 한번 끊고 가고자 한다.

(주어 생략) 너무 철딱서니 없고, 혼자 느긋하고 게으른 것이 대체로 나를 답답하고 화내게 하지만, 나에게 남편의 가장 큰 역할은 별것 아닌 삶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남편이 필요한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나에게 있어 우선순위는 말의 취향이 통하는 사람이었다.

살면서 몇 가지 못마땅한 부분도 물론 있지만 지금도 이 생각은 변함이 없다.

 즉, 나와 평생 사소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


 우리 남편은 정말 말이 많다. 나는 이 남자와 만나기 전에 내가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인지 몰랐다. 나는 낯가림도 심하고, 공적인 곳이나 잘 보여야 할 사람들에게 조심하느라 늘 말수가 적었다. 낯선 사람들과 대화를 이어 간다는 것이 나에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진시키기에 중요한 일들을 앞두고는 더더욱 침묵을 지키는 생활을 해오고 있다.


 생각해 보니 남편의 용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대나무숲이 되어주는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들어주기 뿐만 아니라 시원사이다처럼 대신 욕도 무척 잘해준다.

 남이 나 대신해 주는 욕은, 내가 직접 하는 욕보다 더 쾌감이 크다.



ps. 내가 말이 진짜 많구나 느낀 두 가지 상황이 있다. 남편과 대화할 때 너무 대화가 재밌으면 빨리 다음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서로 먼저 이야기하겠다며 부저를 누를 판이다. 손들고 말하고 끼어들기를 해야 할 정도로 대화가 안 멈춘다. 신혼 때는 침대에 누워 새벽 3-4시까지 수다를 떨었다. 무슨 대화를 그렇게도 매일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학교 강의를 할 때. 비싼 등록금 내고 온 학생들에게 오디오가 비지 않고, 내가 아는 모든 지식과 경험을 강의시간 분초를 가득 채워 쏟아내기 위해서...

딱 이 두 상황 외에 나는 대체로 말이 너무 없는 편이어서 이런 내 침묵 때문에 사람들을 불편해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사석에서 오디오 빌까 봐 아무 말이나 하다가는 늘 후회스러운 상황만 겪어봤기에, 오히려 그냥 불편한 침묵을 인내하는 편이 시간이 흐른 뒤에도 후회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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