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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창 Jun 09. 2020

우리는 소 일지도 모른다.

 과거 직업 특성상 가축 농장을 방문할 일이 많았다.

특히 소 농장에서 ‘소’를 보며 사회라는 ‘우리’ 안에 사는 우리들이 ‘소’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자주 가는 농장의 농장주가 이런 말을 했다. "이놈 참 잘 크는 거 같죠? 잘 먹고 잘 싸고 말도 잘 듣고, 나중에 비싸게 팔릴 겁니다." 소위 ++(투뿔) 등급의 엘리트 소에게 한 말이다. 


 농장주가 시키는 대로 밥 잘 먹고, 때 되면 약도 먹으며 건강하게 자라는 소 들은 농장주의 총애를 받고 자라며, 심지어 주변 소들에게도 질투(?)까지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말 잘 듣고 잘 자란 소들은, 결국 비싼 값에 팔려가고 도축되어 사람의 먹이가 된다.


 농장주가 시키는 대로 잘 커서 좋은 값을 받는 소들은 결국 소의 행복보다 농장주의 주머니를 불리는데 이용되고 나중에는 도축이 된다. 잘 컸던 못 컸던 도축된다. 결국은 ‘타인의 주머니를 불리고 죽는다.’라는 것이다. 


 만약 소가 이런 현실을 자각하더라도 우리에 막혀 평생 벗어날 수가 없다. 벗어나더라도 인간에 의해 이미 야생에서 살 수 없는 환경에 처했기에(최소한 우리나라에서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희망은 없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사회라는 우리를 거부한 채 ‘나를 위한 삶’을 위해 떠날 수가 있다. 어쩌면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난 태어나서 공부를 강요받았다. 요즘은 잘 모르겠지만, 나 때만 해도 대부분의 부모들은 특별한 행복론이나 교육철학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부모와 함께 삶의 이유나, 어떻게 살아야 할지 토론해보는 일 또한 당연히 없었다. 부모들도 먹고 살기 급급해서 으레 공부 잘하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좋은 대학을 가야 하고, 좋은 회사에 취업을 해야 하고,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잘 사는 것, 이것이 부모가 내게 원했고 더 크게는 사회가 나에게 강요했던 부분이었던 것 같다. 물론 부모는 농장주와 같은 마음은 아니었지만, 사회가 부모라는 도구를 써서 우리를 소처럼 키운 것은 아니었을까?


 아이를 낳아보지 않아서 "아이를 키우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행복이다."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서른에 접어든 지금 이런 생각이 강하게 든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직장, 좋은 가정을 가지는 것이 행복의 방법이고, 이것이 세상의 전부일까?’ 나도 이제 사회가 주는 압박에 못 이겨, 방황을 멈추고 흔히 말하는 대세의 물결(취업)의 끝자락에 올라탔다. 그리고 사회가 주는 보상들을 조금씩 받고 있다. 그런데 행복하지 않다. 직장동료들 중에는 사회 시스템에서 만족하고 살 수 있다는 사람들이 대다수였고, 그들은 나 같이 삶에 대한 근본적 고민 자체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문을 가지지 않았고, 앞을 보고 사회적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것에 만족했다. 어떤 때는 그런 태도가 부러웠다. 나에게 이런 의문이 없었다면 나도 저들처럼 평온하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어찌 보면 우리도 사회라는 거대한 시스템이 키우는 ‘소’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공부, 대학, 취업, 가정, 이 모든 것이 당장 나에게 행복을 가져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사회 시스템에는 모든 것이 도움이 된다. 의무교육=사회의 일원으로써 기여할 능력개발, 같이 살 수 있는 공통적 인식과 사회성 개발’, 대학=사회에 필요한 전문적 능력개발, 경쟁의 초기 잣대’, 취업=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경제활동을 하며 우열을 가리고 서로의 비교 잣대가 됨과 동시에 원동력이 됨’, 가정=기존의 사회 시스템이 이어질 수 있도록 만드는 도구로서의 기능과 동시에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생산요소’


 물론 사회생활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면 받아들이고 즐기면 된다. 이런 이들은 시대를 잘 태어난 이들로 사회에서 행복을 찾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한 번쯤 삶에 대해 의문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선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우리’ 안의 ‘소’로서 주는 대로 먹고 자라며 결국 도축되어 농장주의 주머니를 불리기 위해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선택지인 ‘우리’를 박차고 나갈 것 인지를…… 


 그렇게 나가서,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없을지도 모르는 생의 의미를 찾는 적극적인 활동으로 삶을 채워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생활이 힘들어 다시 농장으로 들어가고 싶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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