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쟁이 아줌마의 하소연
도대체 누가 바퀴벌레를 보고 소리를 지르고 도망가면 아가씨, 손바닥으로 때려잡으면 아줌마랬나? 도대체 누가 애 낳고 키우다 보면 세상 무서울 게 없다고 했나? 다 뻥이었다. 겁 많은 아이는 겁 많은 소녀가 되고 겂많은 소녀는 그냥 겁 많은 아줌마만 될 뿐이었다.
어디 무서운 게 바퀴벌레뿐이랴? 나이 50을 바라보는 아줌마가 지나가는 쥐를 보고 까무러치기 직전인 모습을 보인다면 그야말로 꼴불견일 걸 알지만 무서우니 무섭다고 하는 건데 딸은 엄마 놀란 소리에 더 놀란다고 놀린다. 엄만 살아 있는 거, 특히 움직이는 건 다 무서운 걸 어떡하겠니.
언제부터인가 밤 8시 이후론 웬만해선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가로등만 켜진 밤길은 두려움 그 자체다. 어렸을 때는 어디서 도둑고양이라도 튀어나오거나 귀신이라도 마주칠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겁을 냈다면 지금의 밤길은 그 이상으로 무섭다. 등 뒤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도 무섭고 마주 오는 시커먼 그림자도 무섭다. 한 번은 내 그림자에 내가 놀라 소스라친 적도 있다. 밤늦게까지 놀고도 모자라서 혼자 택시 타고 귀가하던 20대의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건지. 그녀는 용감하다 못해 무모했었고 말 그대로 겁대가리를 상실했던 것 같다. 오히려 그때는 밤길보다 택시보다 더 무서운 게 우리 아빠였다. 데드라인이 8 시인 우리 집에선 8시가 넘어가면 삐삐의 진동이 무섭게 울려댔고(맞다. 핸드폰이 아니고 삐삐다) 밤늦은 귀가엔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들어가야 했다. 딸내미 기다리다 깜박 잠드신 울 아버지 깨우면 그날은 뼈도 못 추리므로. 그땐 이해를 못 했다. 대학생 자녀의 데드라인이 어떻게 8시일 수 있으며, 취중 귀가라도 하는 날엔 등짝 스매싱과 폭풍 잔소리를 왜 그리 들어야 하는지. 하지만 이젠 안다. 험한 세상에 딸내미를 내놓은 부모의 심정을. 나도 내 딸이 8시 넘기는 꼴을 어떻게 볼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세상 무서운 것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환상의 나라의 환장할 만한 놀이기구들이다. 이 날 이때까지 회전목마와 범퍼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해서 누군가에겐 꿈과 희망이 있는 그곳이 내게는 공포와 두려움의 네버랜드이다. 고소 공포증에 고속 공포증까지 있어서 살아 움직이는 것들 천지인(새들에게 먹이 주는 체험과 귀신의 집은 거의 비슷한 공포의 대상이다) 그곳은 나에게 환장의 나라인 것이다.
이렇게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세상을 알아갈수록 겁만 많은 아줌마가 되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모르는 게 약이지 싶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래서 뉴스도 잘 안 본다. 뉴스를 보고 나면 세상은 험난 한 곳으로만 느껴진다. 마음이 무거워지는 뉴스들 뿐인 날은 더욱 그렇다. 남편은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좀 알고 살라고 비난하지만 나로선 매우 합리적 변명이라고 생각한다. 나와는 상관없었던 모든 사건 사고가 내가 그것을 아는 순간 나에게도 일어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강박지수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지는 것을, 몰랐던 범죄나 1%로의 확률도 안 되는 사고도 알고 나면 걱정이 앞서는 걸 어떡하란 말인가. “다 알아둬야 대비를 할 수도 있고 대처도 할 수 있는 것”이란 잔소리를 귀가 따갑게 듣지만 어쩔 수 없다. 대비하고 대처하는 남편 등 뒤에 숨을 수밖에. (그런데 그는 과연 용감할까?)
이렇게 강박에 가까운? 공포를 안고 사는 내가 제일 부러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용감한 언니들이다. 슈퍼맨보다 원더우먼이나 소머즈를 더 좋아했던 이유고, 말괄량이 삐삐와 힘센 여자 도봉순을 사랑했던 이유다. 하나님이 어느 날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난 첫째도 둘째도 힘센 여자이다. 물론 힘이 세도 귀신은 무서울 수 있고 놀이기구를 못 탈 수 있지만 나쁜 사람들을 만나면 따끔하게 혼내줄 수 있진 않을까?
어느 날 나에게 호되게 혼나고 난 후 아이가 물었다.
“엄마, 엄마는 세상에서 뭐가 제일 무서워?”
속마음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질문이었다.
“살아있는 건 다 무서워, 넌 뭐가 제일 무서워?”
“엄마!”
세상 무서운 거 천지인 엄마를 제일 무서워하는 딸이라니.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바퀴벌레 한 마리만 봐도 괴성을 지르며 도망간다니. 참 아이러니한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