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올리브 Oct 09. 2020

이별 유예


내 손에서 벗어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들인 시간과 결국 그 모든 시간이 허무해지는 결론을 마주하는 것은 연휴를 앞두고 퇴근 준비를 하는 직장인에게도 떨쳐내기 어려운 잔상을 남겼다. 도통 움직일 기미가 안 보이는 강남역 도로 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한 채 끼어 있는 버스 안에서 ‘오늘 밤만큼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좋아하는 필라테스 수업을 고민 없이 취소한 것도 그 날의 내겐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 기약 없이 유예 해 둔 글을 이번 주말에는 꼭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이 조금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거의 매주 하는 생각이었다. 채 끝내지 못한 일들의 끄트머리를 놓지 못하느라 환승 열차를 놓치고 한 정거장 일찍 내려야 하는 나를 맞아준 건 시원하다기엔 차가운 쪽에 가까운 가을 저녁 공기를 무구한 표정과 몸짓으로 한껏 즐기고 있는 길고양이 가족이었다.

길고양이를 보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었지만 아기 고양이 세 마리와 어미 한 마리로 이루어진 가족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솜털처럼 가벼운 몸으로 자기들끼리 싸우는 듯 노는 듯 한데 엉겨 있던 아기 고양이 두 마리 중 하나가 모여든 사람들을 보고 신기한 눈빛으로 천천히 다가 오려하고 있었다. 길 위의 세상이나 사람을 무서워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할만한 경험을 아직 하지 않은 동물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눈이었다. 이들과의 마주침을 지친 하루를 따스히 마무리하는 사랑스러운 에피소드로 넘기기엔 경계심이 전혀 없던 그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딱 한 번, 본가에 살 때 이미 세팅되어 있던 길 고양이의 밥그릇에 사료를 부어준 적이 전부였기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꽤 오래 당황스러웠다. 앞에 세워져 있던 흰색 그랜저의 블랙박스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한 채 누군가에게 급히 핸드폰을 두드리는 몹시 수상쩍어 보이는 여자 한 명이 있을 것이었다. 어떻게 검색을 해야 할지 몰라 ‘길고양이 밥 주는 법’이나 ‘아기 길고양이 밥 줘도 되나요’  따위로 찾은 결과가 도움이 될 리 없었다. 길고양이의 사진을 자주 찍는 -같은 잡지에 필진으로 있어 매주 마감의 고민을 할- 지인에게 메시지를 보냈지만 바쁜 현대인에게 실시간으로 답장을 받기란 여행사의 고객센터와 전화 연결을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기약 없는 일이었다.


근처 편의점에 무작정 들어가 반려동물 제품 코너에서 아기용 참치와 성묘용 통조림을 샀다. 그리고 물과 일회용 그릇을 구매했다. 매일 지나는 역이었는데 여기에 편의점이 있었구나 생각하면서.  그릇에 물과 아기용 밥, 성묘용 밥을 각각 담고 가족이 있는 곳의 화분 옆에 두었다. 마침 지인에게서 답장이 왔다. 잘 모르지만 기왕이면 인근 주민들이 싫어할 수도 있으니 아이들이 먹는 것을 확인한 뒤 남긴 밥을 정리하고 가면 좋을 것 같다고 해주었다. 마침 다행히도 아기 고양이 한 마리와 어미가 조심스레 와서는 밥을 먹기 시작했다.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지만 다른 아기 고양이 두 마리는 어디로 숨었는지 한참을 보이질 않아서 남은 밥을 치울 수가 없었던 나는 내일 아침에 다시 오기로 하고 자리를 떴다. 집으로 가는 내내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가득 차 올랐다. 조금이라도 허기를 채웠을 거라는 안도감과 함께 혹시라도 내가 무언가 잘못해서 간밤에 가족에게 피해가 가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었다. 그리고 몽이 생각이 많이 났다. 동물을 좋아하는 건 본성이었지만 그들에게 미안함을 가지고 언제든 도움을 주고 싶게 한 건 몽이 덕분이었다.


늦게 귀가한 남편과 방금 있었던 고양이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다음 날 같이 가보자며 마무리가 될 즈음 오늘 낮에 있었던, 잠시 잊고 있었던 일들이 기다렸다는 듯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이 그렇듯 우리 회사 역시 올해 내내 쉽지 않았다. 게다가 여름에 팀장님이 퇴사하며 그 부담은 시니어 리크루터인 나에게 고스란히 넘어왔다. 사실 최근 얼마 동안 나는 커리어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커리어를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커리어에 대한 고민이 없는 것이 고민이었다. 비전이 없는 회사인 데다 어려운 상황이기도 하지만 나는 이 회사에서 하는 내 일이 좋았다. 4년 차가 된 지금 이직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지금 상황이, 비전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여기에 있으려는 상황이 잘못된 걸까. 그러면서도 10년 후 잘 그려지지 않는 내 모습이 두려웠다. 막연했지만 그래도 단단히 자리 잡고 있는 나의 어떤 계획들이 내가 정말 감당할 수 있는 것인지 확신이 없었다.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넓은 세계에서 능력을 펼치고 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게 되는 그 일련의 일들이 더 이상 인생에서 중요해져 버리지 않은 사람에 대해 세상이 언젠가 등을 돌리지는 않을지 그랬을 때 나는 무엇으로 버틸지 알 수 없었다. 모션에 대한 이야기가 언제 어떻게 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늘 동시에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 대화가 그렇듯 이번 주엔 꼭 글을 써야겠다는 내 다짐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글을 계속 쓰는 것만이 나를 지탱할 수 있다는 믿음이 근래 들어 강해진 것도 커리어에 대한 고민과 무관하지 않을 터였다.



이 날 남편과의 대화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오래전 동력을 잃어버린 글 쓰는 모임을 지금까지 끌고 온 그분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았을 것이고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편지에 가까운 길이의 메시지를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언젠가 알아차렸다 하더라도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 모든 게 다 사그라들고 남은 재를 봐도 아무런 감흥이 들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가슴을 파고드는 후회를 감당했어야 할 것이다. 유지해야 할 이유가 얼마 남지 않은, 그래서 더 간절한 사랑뿐인 모임을 현실적인 조건을 견디어가며 이끌어 가는 것은 관계에 회의적인 내가 가장 견디기 힘들어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더 깊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알려고 하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다는 것도, 그 이유도, 나를 속일 순 있어도 옆에서 하루 종일 함께 하는 반려자에까지 숨길 순 없었다.

언젠가 카페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할 때 함께 근무했던 언니가 나에 대해 어떤 감정이 강하게 올라오는 순간, 부끄러워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라는 말해준 적이 있었다. ‘좋은 거예요?’ 묻는 내게 언니는 표정으로 답을 해주었다. 그때 나는 그 표정의 의미를 잘 알아채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마음만으로 어떻게든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온 것처럼, 이후의 일들을 생각하지 않는 어찌 보면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동주의자가 되어 내 멋대로 진심을 뿌리고 그것이 불러일으킬 모든 것들을 외면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이별  앞에서 조금이라도 상처를 덜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었다. 나는 그렇게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도망쳐 왔다.



그리고 나는 이번에도 비겁하게, 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내가 사랑했고, 앞으로도 사랑할 모임에, 그 모임을 만들고 함께 할 수 있도록 해 준 이에게 전했다. 한 사람에게 보낸 메시지였지만 이것은 내게도, 그 시간을 공유했던 모두에게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할 것이다.


이제는 정말 우리가 함께 했던 하나의 계절이 지나갔음을. 고마움도 아쉬움도 고통도 슬픔도 이제는 받아들이는 것만이 남아 있음을.





그냥,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어요.

생각해보면 그동안 모임에 고맙다고는 해도 A님에게는 한 번도 제대로 얘기드린 적 없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근 몇 년 간 A님의 마음, 모임에 대한 마음이든 팀원에 대한 마음이든 그 마음에 저 역시 내심 가장 큰 동의를 하고 공감하고 있던 사람이었다는 얘기도요. 전에도, 이후에도 저는 이 모임을 하면서 함께 해왔던 다시 오지 않을 순간들, 지금도 저를 가늘게 떨리게 하는 날들과 같은 시간을 또 보내지는 못할 거란 확신이 들어요. 대부분의 팀원들도 다르지 않겠죠..

그래서 사실은 더 회의적인 얘기를 부러 꺼내오고 그럴 때마다 차마 A님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던 것도 아마 A님은 이미 느끼고 계셨을 거라 생각해요. 그렇게 회의적으로 말해왔던 저이지만 막상 A님 입에서 제가 그동안 말해왔던 결론을 듣는 날엔 정말 많이 슬플 거라는 것도요.

저는 그동안 A님을 잘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냥 보고 싶지 않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다고 믿었던 것 같아요. A님이 어떤 사람인지 제가 옆에서 느낀 걸, 그 모든 너무 좋은 순간들을 인정해버리면 이 모임은 영영 제게 상처가 될 테니까요..

그래도요. 그 모두가 말하는 날이 언제가 되었건 아니 그런 날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A님에게는 먼저 꼭 고맙다는 얘기를, 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얘기를 꼭 하고 싶었어요.

고마워요 A 씨! 결국 이 모임을 시작해줘서, 저한테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 그리고 모임을 저희가 이만큼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어서요.




작가의 이전글 한 명이면 충분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