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봄은 봄처럼 따뜻한 사람이었다. 말을 천천히 골라 하는 사람, 웃을 때 눈썹부터 천천히 올라가는 사람. 손이 늘 따뜻했고, 무언가를 건넬 땐 늘 두 손으로 건넸다. 그녀는 햇살처럼 나를 감싸는 사람이었다. 쐬면 마음이 포근해지고, 오래 있으면 어느샌가 눈이 감기는. 나는 그런 사람을 처음 만났고, 처음으로, 봄이라는 계절을 기다리게 되었다. 하지만 계절이 그렇듯, 봄은 언제나 짧다.
그녀와 걷던 공원에 벚꽃이 다 지고, 프리지아 향이 조금씩 사라지던 무렵, 우리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었다. 말이 없다는 건 꼭 이별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함께 웃는 일이 줄어든다는 건 대체로 마음이 어긋났다는 뜻이었다. 나는 자꾸만 확인하고 싶어졌다. 나 혼자 걷는 건 아닌지, 그녀가 아직 내 옆에 맞춰 걷고 있는지. 그러다 문득, 확인해야 하는 관계는 이미 사랑이 아닌 걸까, 싶었다.
그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를 지나 그녀와 나는 조용히 놓았다. 아무도 다치지 않게, 계절처럼 서로를 스르르 흘려보냈다.
봄은 그렇게 끝났다.
-
계절이 바뀌고, 나는 여름을 막연히 두려워했다. 햇빛은 너무 강하고, 바람은 무겁고, 무언가 다시 시작될 것만 같아서. 그게 기대가 아니라 부담처럼 느껴졌던 날들. 그 여름의 입구에서 나는 민하를 만났다.
덥고 습한 여름밤이었다. 창이 활짝 열린 작은 술집 안, 달그락거리는 얼음 소리와 무심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 안엔 선명한 그림 하나처럼 민하가 앉아 있었다.
까만 블라우스를 입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지 않은 채,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괴고 있었다. 얇은 눈썹, 크고 동그란 눈, 도톰한 입술. 웃을 땐 왼쪽 볼에 보조개 하나가 쏙 들어가고, 입꼬리가 먼저 올라갔다. 그 웃음은 느렸고, 그 느림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녀가 피우던 액상담배에서 샤인머스캣 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달고 시원한 그 향이 한순간에 여름밤의 공기를 바꿔놓았다. 나는 그 순간, 단정하게 쌓아두었던 마음의 담장이 안에서부터 허물어지는 걸 느꼈다. 무너지는 소리 대신, 익숙한 향처럼 감정이 밀려들었다. 낯선 얼굴인데, 어딘가 오래 기다려온 사람이었다.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여름이 문득 나를 불러 세운 것 같았다.
말 한마디 없이, 나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 아니, 처음 본 게 아닌지도 몰랐다.
“달래소주, 먹어봤어요?”
그녀가 물었다. 목소리는 물을 반쯤 머금은 것처럼 부드러웠다.
“이름이 너무 귀여워서 시켰어요.”
그 말에, 나도 따라 웃었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그 소주를 함께 마셨다. 연신 눈이 마주쳤고, 그 누구도 피하지 않았다. 잔을 들 때마다 손등이 스쳤고, 그때마다 나는 얼음보다 늦게 녹았다.
민하는 말보다 시선을 오래 주는 사람이었다. 그 눈은 놀라울 만큼 정직해서 나는 괜히 시선을 옆으로 흘렸다가 결국 다시 그녀에게 돌아오고 말았다.
우리는 몇 번의 웃음과 몇 잔의 소주 사이에서 조용히 겹쳐졌다. 그 겹침은 열기에 익어가듯 천천히, 잔잔하게 달궈진 마음 위에 스며들었다. 나는 오래 잊고 지냈던 계절의 온도를 다시 느끼기 시작했다.
그날 밤, 우리는 함께 걷지 않았다. 민하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고, 나는 그 뒷모습을 오래 바라봤다. 그 순간 알았다. 이 계절이 쉽게 지나가지 않을 거라는 걸.
머릿속에는 샤인머스캣 향이 떠돌았고, 입속에는 달래소주의 마지막 맛이 남아 있었다. 샤워를 하고 누운 뒤에도 그 향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민하가 거기, 방 안 어딘가에 앉아 있는 것처럼.
나는 아주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민하.
안녕, 나의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