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즈비언 에세이> 3화. 다음에도 너랑 가고 싶어

by 박에녹


유정과 나는 정반대였다. 나는 INFP, 유정은 ESTJ. 나는 “그때 봐서”고, 유정은 “그때까지”였다. 나는 일단 가보자고 했고, 유정은 다 알아보고 가자고 했다. 이쯤 되면 왜 연애를 했나 싶겠지만, 우린 꽤 진하게 연애했고, 급기야 크로아티아로 9박 10일 여행도 떠났다.


여행 계획은 유정이 전부 맡았다. 그녀는 인터넷을 논문처럼 뒤지고, 버스 시간, 우버 예상 요금, 환전소 위치까지 전부 엑셀에 정리해 놨다. 분 단위로 나뉜 일정표를 보면서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대로 될 리가 없지. 그리고 진짜, 도착하자마자 망가졌다.


자그레브 공항에서 우리의 짐이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이스탄불에 남겨져 있었다. 직원은 말했다.


“짐은 내일쯤 도착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요.”


나는 조심스레 유정에게 통역했다. 유정은 말없이 창밖을 봤다. 일정표에는 오늘 저녁 자다르행 버스를 타기로 되어 있었고, 숙소도 거기 잡아놨다.


공항버스를 타고 숙소로 가는 길, 유정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옆에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자다르는 그냥 잠만 자는 도시라며… 오늘은 자그레브 시내 구경하고, 내일 짐 오면 그때 가면 안 될까? 코코아도 마시자.”


유정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게 유정이 내게 내준 첫 번째 유연함이었다.


그날 밤, 숙소엔 난방이 되지 않았다. 기온은 싸늘했고, 침대는 작았다. 우리는 거의 이불처럼 겹쳐 자야 했다. 꼭 껴안고 자야 할 이유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유정의 팔이 내 허리를 감쌌고, 나는 조용히 숨을 고르며 그 품 안에 들어갔다. 따뜻했다. 그리고 좀, 안심됐다.


다음 날 아침, 자다르로 가는 새 버스를 타야 했다. 직원이 알려준 플랫폼에서 기다렸고, 유정은 블로그를 보며 말했다.


“여기 맞대.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버스는 오지 않았다. 나는 플랫폼을 왔다 갔다 하며 행선지를 확인했고, 그럴수록 매연만 들이마셨다. 결국 나는 말했다.


“꼭 여기 있어. 나 매표소 다녀올게.”

직원은 티켓을 한참 들여다보다 말했다.

“번호가 잘못 찍혔네요. 이미 출발했어요.”


나는 새 표를 끊어 다시 돌아갔다. 유정은 여전히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말했다.


“버스 떠났대. 플랫폼이 틀렸대.”

“그럴 리 없는데… 블로그에도 여기가 맞다고 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 화가 났다. 나는 소리쳤다.


“이게 다 크로아티아 놈들 때문이야! 망할 크로아티아 놈들!”


유정이 피식 웃었다. 그걸로 됐다.


여행은 계속됐다. 서로의 방식은 여전히 달랐다. 길을 찾을 때면, 유정은 지도를 봤고 나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었다. 식당을 고를 땐, 유정은 블로그 평점과 리뷰를 꼼꼼히 확인했고 나는 그냥 현지인 많은 데가 낫지 않냐고 했다. 결국엔 늘 유정이 고른 데로 갔다. 그래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블로그 맛집은 대부분 짰고, 가게 안엔 온통 한국인뿐이었다.


“이상하다… 블로그에선 맛있다고 했는데…”


몇 번의 실패 끝에 우리는 숙소 주인이 추천한 가게에 갔다. 거긴 진짜 맛있었다. 그 이후부터는 그냥, 걷다 눈에 띄는 데로 들어갔다. 유정도, 나도 그게 훨씬 좋았다. 그렇게 우린, 우리만의 방식을 조금씩 만들어갔다.


두브로브니크에 도착한 날, 햇빛이 대책 없이 쏟아졌다. 택시는 줄지어 있었고, 나는 “아무거나 타자”고 했다. 유정은 우버를 켰다. 안 잡혔다. 나는 기사 아저씨한테 주소를 보여줬다.


“위 고 히얼.”

아저씨는 “노 프라블럼” 하고 웃었다. 나는 트렁크를 열고 짐을 실었다. 그리고 말도 없이 먼저 차에 올라탔다.


숙소에 도착해 씻고, 침대에 엎드린 채 한참을 있다가 물었다.


“화났어?”

“… 아니.”

“근데 왜 말 안 해?”

“그 택시… 나는 좀 불안했어.”

“그럼 말하지.”

“너는 왜 늘 먼저 결정해?”


우리는 서로의 방식이 다르다는 걸 알았지만, 그 다름이 마음까지 멀게 만들 줄은 몰랐다. 그래서 서운한 마음을 다정하게 말하는 법도, 서툴렀다.


그날 밤, 우리는 등을 지고 누웠다. 서로의 온기가 느껴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정의 침묵이 화인지, 실망인지 몰랐고, 그래서 더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유정이 먼저 등을 돌려주길 바랐고, 유정은 내가 먼저 말을 걸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에서 하이킹을 끝내고 스플리트행 버스를 탔다. 좌석에 앉자마자 멍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짐을 전부 정류장에 두고 온 걸 깨달았다. 여권, 돈, 옷, 세면도구. 모든 게 거기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마이 에브리띵이 거기 있었다. 고민할 것도 없이 그대로 버스기사에게 걸어갔다.


“퍼스트 버스 스탑… 마이 백… 마이 패스포트… 머니… 에브리띵… 플리즈… 플리즈 고 백…”


말은 거의 울음에 가까웠다. 기사님은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 타이밍에 버스는 두 번째 정류장에 멈췄고, 외국인 여자 셋이 내렸다. 그 뒤를 따라 기사님도 내렸고, 나도 내렸다.

“마이 에브리띵…”


그 순간 눈물이 났다. 진짜 내 모든 게 거기 있었고, 진짜 좆됐었기 때문이다. 기사님은 나를 한 번 보더니 말없이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말했다.


“직원이 가져온대요. 돈 워리.”


조금 있다가 진짜로 차 한 대가 왔고, 직원이 짐을 건넸다. 나는 “암 쏘 쏘리… 땡큐 쏘 마치…”를 허리 90도로 백 번쯤 했고, 자리로 돌아가는 길에도 주변 외국인들한테 큰소리로 외쳤다.


“암 쏘 쏘리, 땡큐 쏘 마치!!”


진심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말이었다. 눈물, 콧물, 감격.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유정이 보였다. 아, 맞다. 유정이 있었지.


유정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있었고, 얼굴엔 온갖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다행이고, 안쓰럽고, 웃기고, 귀엽고… 약간 부끄러운 듯도 하고.


“나 그러고 있는 동안 뭐 했어…?”

“이 동네 숙소 찾고 있었지.”


나는 울고 있었고, 얘는 플랜 B를 세우고 있었다. 참 나답고, 참 유정답다 싶었다. 그게 또 너무 웃겨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때 유정이 내 손을 잡았다. 말없이, 그냥. 그 손이 참 따뜻했다. 내가 한참을 헤맬 동안, 유정은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유정이 계획하지 않았다면, 나는 짐조차 못 쌌을 것이다. 내가 그 계획을 망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토록 많이 웃지도 못했을 거다. 여행 내내 싸우고, 헤매고, 길 잃고, 울고, 껴안고, 또 웃었다.


그러니까… 다음에 또 가게 된다면, 역시 너랑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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