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은, 우리가 사랑을 감추며 서로를 챙기던 날이었다.
내가 유정의 집에 보낼 선물,
유정이 우리 집에 보낼 선물.
그걸 함께 고르며, 우리는 늘 조심스러웠다.
선물을 고르기 전, 잠깐의 침묵이 있었다.
그 집 부모님은 나를 ‘언니’로 알고 있고,
우리 부모님은 유정을 ‘후배’로 아셨다.
그 이상의 관계는, 아무도 몰랐다.
그래서 늘 선물의 격을 조심했다.
너무 과하면 눈치챌까 봐,
너무 성의 없어 보이면 실례일까 봐.
유정은 조용히 물었다.
“이번엔 뭐가 괜찮을까… 너무 티 나지 않게.”
나는 전복 세트를 집어 들었다.
“작년엔 갈비였으니까, 이번엔 전복이 무난할 것 같아.”
잘 포장된 거짓 위에 조심스럽게 마음을 얹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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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모두 우리를 참 좋아해 주셨다.
유정 어머니는 내가 보낸 선물에 정중한 문자를 보내주셨고,
우리 엄마도 유정이 가져온 화과자를 웃으며 함께 드셨다.
그 웃음은 따뜻했지만,
어디까지나 ‘그날의 손님’으로만 유정을 반기는 웃음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가족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애인’이라는 말은, 우리 중 누구도 먼저 꺼내지 못했다.
대신, 늘 이렇게 소개했다.
“이쪽은 저희 학교 언니예요.”
“얘는 내 후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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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의 집에 가는 날, 나는 늘 긴장했다.
들뜨지도, 편하지도 않았다.
따뜻한 집일수록 내 마음은 더 얼어붙었다.
말이 빠른 아버지와 음식이 빠른 어머니,
장난을 주고받는 남매들 사이에
나는 조용한 이방인처럼 앉아 있었다.
어느 명절 저녁, 다 같이 둘러앉아 고스톱을 치고 있었다.
유정이 내 손등을 툭 치며 말했다.
“자기 차례야!”
그 말에 아버지가 고개를 들었고,
어머니는 방금 내려놓으려던 패를 멈췄다.
‘자기’라는 단어가 방 안에 또렷하게 맴돌았다.
유정은 늘 조심스러웠다.
가족 앞에서는 빠짐없이 나를 ‘언니’라 불렀다.
그러니 그 한 마디가, 더 뚜렷하게 남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웃는 얼굴을 흉내 냈다.
유정은 곧바로 알아차리고, 황급히 말을 고쳤다.
“아… 언니 차례야.”
아무도 그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지금도 그 장면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땐 유정이 나를 지키려던 걸까, 숨기려던 걸까.
유정은 말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 자신이 내민 호칭의 무게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아닌, 역할로만 있어야 했던 자리에서
불쑥 튀어나온 진짜 호칭 하나.
그 말 하나가, 조용한 방 안에 오래 머물렀다.
아무도 무너지지 않기 위해,
그 방 안의 모두가,
잠깐씩, 각자의 방식으로 연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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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더 많이 숨겼다.
이름을 바꿔 부르고, 관계를 감추고,
선배인 척, 친구인 척,
아예 모르는 사람인 척한 적도 있었다.
숨기면 숨길수록,
진짜 내 마음을 꺼내기 어려워졌다.
나는 그 사람들을 사랑했고,
그들의 부모님께 잘 보이고 싶었다.
명절 선물을 고르고,
밥상 앞에 조심스레 앉고,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마음을 전했다.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 진심은,
애초에 내 자리가 설명될 수 없는 곳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사귀는 사이’라고 말할 수 없었고,
누가 물어보는 일도 없었다.
그러니 내가 먼저 밝힐 기회도, 용기도 가질 수 없었다.
나는 ‘고마운 언니’로 환대받으며,
늘 중심에서 한 발짝 비켜 서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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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유정의 어머니가 말했다.
“아휴, 우리 유정이에게 에녹이 같은 언니가 있어서 다행이야.”
나는 웃었다.
습관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예의 있게 웃었다.
하지만 그 말은,
속을 긁는 손톱처럼 마음 어딘가를 조용히 긁고 지나갔다.
‘같은 언니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말.
그 말은 나를 다시 ‘언니’라는 틀에 가두었다.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없는 자리로,
나를 더 깊이 묶어두었다.
그때야 알았다.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사랑을 설명할 말들은
여전히, 우리 몫이 아니었다는 걸.
그래도 유정과는 달랐다.
그 감정은, 너무 오래 숨기기엔
너무 조심스럽게 쌓아 올린 사랑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말하고 싶었다.
엄마에게. 유정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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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한 번은 말을 꺼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오래 미뤄온 이야기였고, 오래 준비한 용기였다.
재작년, 나는 엄마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엄마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너무 길어서,
내가 말을 꺼낸 걸 후회하려던 찰나에
엄마가 입을 열었다.
조용한 목소리였다.
“그래, 네가 좋다면… 엄마는 괜찮아.”
그 말이 진심이었는지는 오래 따지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날 이후 엄마의 눈빛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오히려, 더 따뜻해졌다고 느낀 순간도 있었다.
그 후로 엄마는 몇 명의 애인을
‘여자친구’라 불러주었고,
그들에 대해 조심스럽게 이것저것 물어왔다.
서툴지만 진심인 태도였기에, 고마웠다.
그제야, 아주 조금 안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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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직도,
여자친구의 부모님에게 나는
단 한 번도 ‘애인’으로 소개된 적이 없다.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웃고, 설거지를 도우며
나는 언제나 고마운 ‘언니’였다.
나는, 그 이상이 되고 싶었다.
사랑의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
숨기지 않아도 되는 사람.
-
종종 상상했다.
유정이 엄마에게 말하는 장면을.
“엄마, 나… 언니랑 사귀어.
언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그 장면은 수없이 되풀이됐지만,
단 한 번도 현실이 된 적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기다린다.
언젠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그 사람의 부모님 앞에 서게 될 날을.
그날이 온다면,
나는 나의 이름으로, 숨지 않은 얼굴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 이 사람과 가족이 되고 싶습니다.”
그 순간의 내가,
처음으로 사랑의 이름으로 불리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