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즈비언 에세이> 7화. 사랑의 이름으로

by 박에녹



명절은, 우리가 사랑을 감추며 서로를 챙기던 날이었다.

내가 유정의 집에 보낼 선물,

유정이 우리 집에 보낼 선물.

그걸 함께 고르며, 우리는 늘 조심스러웠다.


선물을 고르기 전, 잠깐의 침묵이 있었다.

그 집 부모님은 나를 ‘언니’로 알고 있고,

우리 부모님은 유정을 ‘후배’로 아셨다.

그 이상의 관계는, 아무도 몰랐다.


그래서 늘 선물의 격을 조심했다.

너무 과하면 눈치챌까 봐,

너무 성의 없어 보이면 실례일까 봐.


유정은 조용히 물었다.

“이번엔 뭐가 괜찮을까… 너무 티 나지 않게.”

나는 전복 세트를 집어 들었다.

“작년엔 갈비였으니까, 이번엔 전복이 무난할 것 같아.”


잘 포장된 거짓 위에 조심스럽게 마음을 얹는 일이었다.


-


두 집 모두 우리를 참 좋아해 주셨다.

유정 어머니는 내가 보낸 선물에 정중한 문자를 보내주셨고,

우리 엄마도 유정이 가져온 화과자를 웃으며 함께 드셨다.

그 웃음은 따뜻했지만,

어디까지나 ‘그날의 손님’으로만 유정을 반기는 웃음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가족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애인’이라는 말은, 우리 중 누구도 먼저 꺼내지 못했다.

대신, 늘 이렇게 소개했다.

“이쪽은 저희 학교 언니예요.”

“얘는 내 후배야.”


-


유정의 집에 가는 날, 나는 늘 긴장했다.

들뜨지도, 편하지도 않았다.


따뜻한 집일수록 내 마음은 더 얼어붙었다.

말이 빠른 아버지와 음식이 빠른 어머니,

장난을 주고받는 남매들 사이에

나는 조용한 이방인처럼 앉아 있었다.


어느 명절 저녁, 다 같이 둘러앉아 고스톱을 치고 있었다.

유정이 내 손등을 툭 치며 말했다.

“자기 차례야!”


그 말에 아버지가 고개를 들었고,

어머니는 방금 내려놓으려던 패를 멈췄다.

‘자기’라는 단어가 방 안에 또렷하게 맴돌았다.


유정은 늘 조심스러웠다.

가족 앞에서는 빠짐없이 나를 ‘언니’라 불렀다.

그러니 그 한 마디가, 더 뚜렷하게 남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웃는 얼굴을 흉내 냈다.


유정은 곧바로 알아차리고, 황급히 말을 고쳤다.

“아… 언니 차례야.”


아무도 그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지금도 그 장면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땐 유정이 나를 지키려던 걸까, 숨기려던 걸까.

유정은 말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 자신이 내민 호칭의 무게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아닌, 역할로만 있어야 했던 자리에서

불쑥 튀어나온 진짜 호칭 하나.

그 말 하나가, 조용한 방 안에 오래 머물렀다.


아무도 무너지지 않기 위해,

그 방 안의 모두가,

잠깐씩, 각자의 방식으로 연기를 했다.


-


예전엔, 더 많이 숨겼다.

이름을 바꿔 부르고, 관계를 감추고,

선배인 척, 친구인 척,

아예 모르는 사람인 척한 적도 있었다.

숨기면 숨길수록,

진짜 내 마음을 꺼내기 어려워졌다.


나는 그 사람들을 사랑했고,

그들의 부모님께 잘 보이고 싶었다.

명절 선물을 고르고,

밥상 앞에 조심스레 앉고,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마음을 전했다.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 진심은,

애초에 내 자리가 설명될 수 없는 곳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사귀는 사이’라고 말할 수 없었고,

누가 물어보는 일도 없었다.

그러니 내가 먼저 밝힐 기회도, 용기도 가질 수 없었다.

나는 ‘고마운 언니’로 환대받으며,

늘 중심에서 한 발짝 비켜 서 있어야 했다.


-


한 번은 유정의 어머니가 말했다.

“아휴, 우리 유정이에게 에녹이 같은 언니가 있어서 다행이야.”


나는 웃었다.

습관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예의 있게 웃었다.

하지만 그 말은,

속을 긁는 손톱처럼 마음 어딘가를 조용히 긁고 지나갔다.


‘같은 언니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말.

그 말은 나를 다시 ‘언니’라는 틀에 가두었다.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없는 자리로,

나를 더 깊이 묶어두었다.


그때야 알았다.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사랑을 설명할 말들은

여전히, 우리 몫이 아니었다는 걸.


그래도 유정과는 달랐다.

그 감정은, 너무 오래 숨기기엔

너무 조심스럽게 쌓아 올린 사랑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말하고 싶었다.

엄마에게. 유정에 대해.


-


결국, 한 번은 말을 꺼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오래 미뤄온 이야기였고, 오래 준비한 용기였다.

재작년, 나는 엄마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엄마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너무 길어서,

내가 말을 꺼낸 걸 후회하려던 찰나에

엄마가 입을 열었다.

조용한 목소리였다.


“그래, 네가 좋다면… 엄마는 괜찮아.”


그 말이 진심이었는지는 오래 따지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날 이후 엄마의 눈빛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오히려, 더 따뜻해졌다고 느낀 순간도 있었다.


그 후로 엄마는 몇 명의 애인을

‘여자친구’라 불러주었고,

그들에 대해 조심스럽게 이것저것 물어왔다.

서툴지만 진심인 태도였기에, 고마웠다.

그제야, 아주 조금 안도했다.


-


하지만 아직도,

여자친구의 부모님에게 나는

단 한 번도 ‘애인’으로 소개된 적이 없다.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웃고, 설거지를 도우며

나는 언제나 고마운 ‘언니’였다.


나는, 그 이상이 되고 싶었다.

사랑의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

숨기지 않아도 되는 사람.


-


종종 상상했다.

유정이 엄마에게 말하는 장면을.


“엄마, 나… 언니랑 사귀어.

언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그 장면은 수없이 되풀이됐지만,

단 한 번도 현실이 된 적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기다린다.

언젠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그 사람의 부모님 앞에 서게 될 날을.


그날이 온다면,

나는 나의 이름으로, 숨지 않은 얼굴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 이 사람과 가족이 되고 싶습니다.”


그 순간의 내가,

처음으로 사랑의 이름으로 불리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