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나를 떠난 건 피렌체의 어느 광장에서였다.
“이제부터는 각자 여행하자.”
그 말은, 그러니까, 우리 이쯤에서 헤어지자는 뜻이었다.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왜 헤어지는지도 모르겠고, 뭐가 그렇게 잘못됐는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다. 주머니에는 12유로가 있었고, 핸드폰은 데이터가 끊겨 아무 데도 닿지 않았다.
어젯밤, 같은 광장에서 그녀는 내게 사랑한다고 했다. 이탈리아의 여름밤은 길고, 그녀의 눈은 반짝였고, 나는 그 순간이 아주 오래갈 줄 알았다.
그녀는 말했다.
“이대로 한국 안 돌아가면 안 돼?”
그 말이 하루 만에 사라졌다. 광장은 그대로인데, 말만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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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뜨라베르시아모.”
길을 건널 때마다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았다. 그 말은 ‘건너자’라는 뜻이지만, 그녀가 할 땐 꼭 ‘같이 가자’, ‘나는 너 혼자 두지 않을게’처럼 들렸다.
그녀가 발음하는 이탈리아어는 늘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단어마다 목소리가 스며 있었고, 말끝에는 어딘가 따뜻한 울림이 남았다. 그래서 나는 자꾸 물었다. 이탈리아어를 알려달라고, 인사는 뭐냐고, ‘미안합니다’는 어떻게 하냐고.
“그럼… 씨발은?”
그녀가 웃었다.
“그걸 왜 궁금해해.”
“궁금해. 알려줘.”
“…께 까쬬.”
“께 까쬬!!!!!!!!!”
우리는 밀라노 두오모 성당 앞에서 ‘께 까쬬’를 외치며 한참 웃었다. 관광객이 지나가고, 비둘기가 날아가고, 이상한 두 사람이 광장 한복판에서 욕을 소리치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녀가, 갑자기. 그것도 피렌체에서. 내 손을 놓을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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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밀라노에서 예술을 공부하는 유학생이었다. 처음엔 그게 그냥 멋있어 보였다. 유럽에 있는 누군가와 메시지를 주고받는다는 게, 조금은 비현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매일 안부를 물었고, 그녀는 틈틈이 답장을 보냈다. 아침마다 마주치는 골목의 길고양이, 비에 젖은 돌바닥, 창밖으로 보이는 맑은 하늘 같은 사진들. 말보다는 사진이 많았고, 나는 그걸 한참 들여다보곤 했다. 공기나 빛 같은, 말로 전해지지 않는 것들이 그 안에 담겨 있는 것 같아서.
어느새 우리는 매일 밤 서로의 하루를 나눴다. 그녀는 밀라노의 바람을 보내왔고, 나는 서울에서 그녀의 시간에 맞춰 잠들었다. 그렇게 몇 달을 주고받다 보니, 자연스럽게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학이 되자 나는 그녀를 보러 갔다. 그녀는 이미 한 달간의 여행 일정을 짜두고 있었다. 첫 만남이자, 첫 여행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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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래 잘 잊는 사람이다. 그녀가 알려준 단어도, 막 다녀온 성당 이름도, 방금 지나온 골목의 카페 이름도 다 까먹었다. 그녀는 처음엔 웃으며 다시 알려줬다. 손끝으로 눈을 비비며, “진짜 귀엽게도 잘 까먹는다”며 웃었다. 두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면서, 지도를 다시 보여주고, 발음까지 또박또박 읽어줬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세히 알려주고, 천천히 기다려주고, 내가 뭔가를 기억하지 못해도 한 번쯤은 웃으며 넘겨
주는 사람.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그녀의 표정이 조금씩 달라졌다. 그날도 그랬다. 오래된 성당 앞에서, 나는 또 물었다.
“여기 이름이 뭐라고?”
그녀는 물병 뚜껑을 만지작거리다가, 내 얼굴을 피하며 말했다.
“…또 까먹었어? 아까도 말했잖아.”
말끝이 떨렸고, 억지로 웃는 얼굴이었다.
잠깐의 정적.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미안, 요즘 머리가 좀…” 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방 끈을 어깨에 다시 걸치고는, 한참을 성당 쪽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나만 이 여행을 기억하는 것 같아.”
햇볕은 쨍쨍했고, 광장은 북적였지만 우리는 멈춰 있었다. 그녀의 말은 조용했지만, 낮게 흔들렸다. 그녀는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떨궜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 순간의 내 표정은 지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부터 나는 더 조심스러워졌고, 조심스러울수록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또 물었고, 그녀는 또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계속 물었다. 마치 묻고 있는 동안엔, 우리 사이가 아직 괜찮은 것처럼 느껴져서.
하지만 그 설명에는 점점 말투가 빠졌고, 표정이 비워졌다. 어느 날은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채, 그녀가 걷기 시작한 적도 있었다. 나는 뒤따라가며 아무 말없이 그녀의 그림자만 밟았다. 그 여행은 점점, 그녀 혼자 짊어지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광장에서, 조용히, 그러나 명확하게, 그녀는 내 손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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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숙소로 돌아왔다. 어떻게 찾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걷고, 멈추고, 또 걷고. 그러다 도착했다. 그녀는 거기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천천히 눈을 들었다. 아무 말도 없었다. 말을 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말이 지나간 뒤였다. 우리는 말없이, 그렇게 밤을 함께 지나 보냈다.
그 적막 속에서 내 머릿속을 맴도는 단어는 단 하나였다.
께 까쬬.
‘미안합니다’는 까먹었고, ‘안녕하세요’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가 정성껏 알려준 말들 중 끝까지 남은 건, 그거 하나였다.
나는 결국, 씨발만 기억하는 연인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신호등 앞에 혼자 서 있었다.
그녀가 늘 하던 말이 떠올랐다.
아뜨라베르시아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