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즈비언 에세이> 9화. 3천만 원의 계절

by 박에녹


그 여름을 떠올리면,

사랑보다 숫자가 먼저 떠오른다.


나는 민하와 여름을 시작했다.

빠르고 조용하게,

확신처럼 다가온 계절이었다.


사귄 지 2주 만에 반지를 맞췄다.

그때의 나는

사랑이 이렇게 빠르고 또렷할 수도 있다는 걸

처음으로 믿었다.

반지를 고르는 손끝에,

오래 함께할 마음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너무 빨리 시작했고,

나는 그만큼 빨리 믿었다.

이 사람이 나의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근거 없는 확신.



사귄 지 정확히 4주째 되는 날이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 어려운 부탁 하나 해도 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의 말이라면,

나는 어느 정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3천만 원만 빌려줄 수 있어?

전전 여자친구한테 갚아야 할 돈이야.”


뇌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3천만 원.

그 숫자는 너무 무거웠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너무 가볍게 들렸다.

우리 사이에서는 그래서는 안 될 만큼.


나는 당황했지만

차분하게 말했다.

“법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도와줄게.

너 혼자 짊어질 문제 아니야.”


그녀는 잠시 눈을 피하며 말했다.

“법적인 도움은 필요 없어. 그냥, 3천만 원이면 돼.”

말끝이 살짝 떨렸지만,

그 말은 꽤 단호했다.


그 순간,

나는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처음으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진짜, 나한테 빌려달라는 거야?”


제발. 지금이라도 아니라고 해. 제발.


그녀는 잠시 말을 아꼈다.

하지만 이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응. 빌려줘.”


그 대답 뒤로는

아무것도 이어질 수 없었다.



며칠 동안,

나는 혼자 마음을 정리했다.

그녀를 사랑한다는 감정과,

그 사랑으로 무엇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

조용히 가늠해 보았다.


돈의 액수도 문제였고,

그걸 꺼내는 방식은 더 큰 문제였다.

너무 크고, 너무 가볍게 던져진 그 말.


결국,

나는 헤어지자고 말했다.


그녀는 물었다.

“내가 빚 있어서 그래?”


그 말이 마음을 더 멀어지게 했다.

내가 단지 빚 때문에 흔들리는 사람으로 보였던 걸까.


“그냥, 이게 내 결론이야.”

나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제야 민하는

조금은 미안하다고 했고,

조금은 붙잡는 듯했지만,

어디까지가 진심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잠깐 망설이듯, 덧붙이듯 말했다.


“한 달 동안 나 좋아해 줘서 고마웠어. 잘 지내.”


우리 사랑은,

시작도 끝도

너무 속전속결이었다.



나는 정말 그녀를 사랑했다.

어쩌면 마지막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마지막 사랑이길 바랐다.


사귄 지 2주 만에 맞춘 반지는

어쩌면 민하도 나와 같은 마음이길 바라는

내 쪽의 조급함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그 반지를 나눴다는 사실만으로

함께할 미래가 이미 정해진 듯 느껴졌다.


그 마음이 너무 진심이었기에,

상처도 그만큼 깊었다.



나는 아직

그 여름을 견디는 중이다.


누군가를 다시 좋아하게 될 수 있을지,

사랑이 다시 가능할지

잘 모르겠다.


쉽게 믿고, 쉽게 마음을 내어줬던 나는

그 여름에 멈춰 선 채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누군가의 메시지를 기다리다 말고,

핸드폰 화면을 뒤집어 놓는다.

아무 일도 없던 척,

하루를 버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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