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을 떠올리면,
사랑보다 숫자가 먼저 떠오른다.
나는 민하와 여름을 시작했다.
빠르고 조용하게,
확신처럼 다가온 계절이었다.
사귄 지 2주 만에 반지를 맞췄다.
그때의 나는
사랑이 이렇게 빠르고 또렷할 수도 있다는 걸
처음으로 믿었다.
반지를 고르는 손끝에,
오래 함께할 마음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너무 빨리 시작했고,
나는 그만큼 빨리 믿었다.
이 사람이 나의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근거 없는 확신.
⸻
사귄 지 정확히 4주째 되는 날이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 어려운 부탁 하나 해도 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의 말이라면,
나는 어느 정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3천만 원만 빌려줄 수 있어?
전전 여자친구한테 갚아야 할 돈이야.”
뇌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3천만 원.
그 숫자는 너무 무거웠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너무 가볍게 들렸다.
우리 사이에서는 그래서는 안 될 만큼.
나는 당황했지만
차분하게 말했다.
“법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도와줄게.
너 혼자 짊어질 문제 아니야.”
그녀는 잠시 눈을 피하며 말했다.
“법적인 도움은 필요 없어. 그냥, 3천만 원이면 돼.”
말끝이 살짝 떨렸지만,
그 말은 꽤 단호했다.
그 순간,
나는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처음으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진짜, 나한테 빌려달라는 거야?”
제발. 지금이라도 아니라고 해. 제발.
그녀는 잠시 말을 아꼈다.
하지만 이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응. 빌려줘.”
그 대답 뒤로는
아무것도 이어질 수 없었다.
⸻
며칠 동안,
나는 혼자 마음을 정리했다.
그녀를 사랑한다는 감정과,
그 사랑으로 무엇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
조용히 가늠해 보았다.
돈의 액수도 문제였고,
그걸 꺼내는 방식은 더 큰 문제였다.
너무 크고, 너무 가볍게 던져진 그 말.
결국,
나는 헤어지자고 말했다.
그녀는 물었다.
“내가 빚 있어서 그래?”
그 말이 마음을 더 멀어지게 했다.
내가 단지 빚 때문에 흔들리는 사람으로 보였던 걸까.
“그냥, 이게 내 결론이야.”
나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제야 민하는
조금은 미안하다고 했고,
조금은 붙잡는 듯했지만,
어디까지가 진심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잠깐 망설이듯, 덧붙이듯 말했다.
“한 달 동안 나 좋아해 줘서 고마웠어. 잘 지내.”
우리 사랑은,
시작도 끝도
너무 속전속결이었다.
⸻
나는 정말 그녀를 사랑했다.
어쩌면 마지막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마지막 사랑이길 바랐다.
사귄 지 2주 만에 맞춘 반지는
어쩌면 민하도 나와 같은 마음이길 바라는
내 쪽의 조급함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그 반지를 나눴다는 사실만으로
함께할 미래가 이미 정해진 듯 느껴졌다.
그 마음이 너무 진심이었기에,
상처도 그만큼 깊었다.
⸻
나는 아직
그 여름을 견디는 중이다.
누군가를 다시 좋아하게 될 수 있을지,
사랑이 다시 가능할지
잘 모르겠다.
쉽게 믿고, 쉽게 마음을 내어줬던 나는
그 여름에 멈춰 선 채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누군가의 메시지를 기다리다 말고,
핸드폰 화면을 뒤집어 놓는다.
아무 일도 없던 척,
하루를 버틴다.